당대의 문화·이데올로기를 캔버스 안에… 명화, 역사를 품다

맹경환 2024. 8. 2.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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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사유하는 미술관
김선지 지음
RHK, 392쪽, 2만5000원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근대에는 많은 빛과 그림자가 남았다. 프랑스 철도 개통으로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 교외에서 유쾌한 일상을 즐기며 명작들을 남겼지만 고된 노동을 마치고 객차에 몸을 싣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놓치지 않는 사실주의 화가도 있었다. 산업화의 부산물인 영국 런던의 스모그는 어떤 화가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르누아르의 ‘보트놀이 일행의 오찬’. RHK 제공


책의 부제는 ‘그림 속 잠들어 있던 역사를 깨우다’이다. 저자의 얘기대로 그림 속에는 그 시대와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다양하고 풍요로운 정보가 들어 있다.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문화와 관습, 이데올로기를 비롯해 무엇을 먹고 입었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은 언어가 아니라 색채로 표현된, 눈으로 감상하는 역사책인 셈이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의 근교 도시에서 센강을 배경으로 한 명화를 많이 남겼다. 마네의 ‘뱃놀이’는 아르장퇴유에서 보트를 타고 느긋한 오후의 여가를 보내고 있는 남녀를 묘사한다. 마네는 아르장퇴유에서 센강만 건너면 되는 곳에 살았던 모네와도 자주 교류했다. 모네와 함께 여름을 보내던 마네는 모네가 보트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담은 ‘보트에서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책은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를 벗어나서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철도의 건설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1837년 건설된 파리의 생 라자르역에서 파리 시민들은 손쉽게 교외로 뻗은 철로를 따라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파리 주변의 조용한 시골 마을들은 휴양지들로 변했다. 파리 시민들은 해안 도시로 향하는 ‘유쾌한 열차’를 타고 해변에서 즐거운 주말을 즐겼다. 그들 중에 화가들이 빠질 수 없었다. 르누아르의 ‘보트 놀이 일행의 오찬’은 느긋하게 먹고 마시며 삶을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평범을 일상을 보여준다.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는 센강 북서쪽 사투에 있는 식당 ‘메종 푸르네즈’로 인상파 화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인상파 화가들이 목가적인 자연과 중상류층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묘사했다면,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과 고단한 삶을 그려낸 사실주의 화가들도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좁고 더러운 삼등석 객차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포착한 ‘삼등석 객차’의 오노레 도미에와 가난과 질병, 폭력과 범죄의 어두운 그림자에 묻힌 영국 런던의 이면을 담은 ‘런던, 순례’의 귀스타브 도레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도미에나 도레의 작품은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의 어두운 면을 부각함으로써 개혁을 위해 나아가는 데 한 걸음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면서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말했다. 영국 산업혁명의 악명 높은 부산물인 ‘스모그’는 뜻하지 않게 많은 명화를 탄생시켰다. “안개가 없었다면 런던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라던 모네는 1899년에서 1905년 사이 주기적으로 런던에 머물며 안개에 둘러싸인 도시의 풍경을 그린 100여점의 ‘런던 시리즈’를 작업했다. 책은 그림을 통해 ‘근대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

도미에의 '삼등석 객차'. RHK 제공


책은 그림 속에 기억된 ‘힘과 권력의 역사’도 훑는다. 특히 정신 질환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이어졌다. 중세 때는 정신병을 악령이 깃든 것으로 생각해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는 잠재적 범죄자로 여긴 정신병 환자는 강제로 격리돼 학대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심지어 부유층들에게 정신병 환자들은 동물원의 동물처럼 ‘관광 상품’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매드 하우스’에서는 이런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광기는 긍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정신 질환을 앓았던 프란시스 고야(‘성 이시도로의 순례’)나 빈센트 반 고흐(‘별이 빛나는 밤’ ‘정신 병원의 복도’)는 천재적 창의성이 발휘된 걸작들을 남겼다. 저자는 “생각과 가치관은 늘 바뀐다. 과거의 비정상은 현재의 정상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있다”면서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고 강조한다.

모네의 '웨스터민스터 브리지 아래 템스강'. RHK 제공


책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인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기도 한다. 노예 신분에서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권력을 차지했던 록셀라나와 술탄(군주)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하렘에 대한 삐뚤어진 시각이 대표적이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쉴레이만 1세의 왕비가 된 록셀라나는 정책 조언자이자 외교 정책과 국제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록셀라나는 술탄을 성적으로 유혹해 타락시킨 음탕한 여성, 오스만 제국을 파멸로 이끈 요부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하렘도 성적 쾌락과 부도덕이 판치는 이국적인 환락의 장소로 묘사됐다.

책은 이밖에 당시 패션의 중심지였던 스페인의 아성을 무너뜨린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콤플렉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해와 진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인디언 공주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를 어떻게 환상적인 거짓말로 재포장했는지 등을 다룬다. 또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시작돼 유럽을 사로잡은 커피가 어떻게 현대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는지도 흥미진진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책을 통해 미술 작품을 살펴보는 동시에 그 안에 깃든 역사와 사회, 문화, 가치관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 세·줄·평 ★ ★ ★
·그림으로 설명하는 역사
·그래서 더 역사가 흥미롭다
·오해와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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