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폭염 피해 막을 ‘가로수 녹색양산 전략’ 펴야
자주 이용하는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걸음을 옮기는데 첫 30m 정도는 가로수가 한 그루도 없다. 한여름 대낮 폭염 와중에 이 짧은 구간을 걸을 때 살이 익는 듯한 불편을 느낀다. 가로수가 시작되는 구간부터 체감 온도가 뚝 떨어지면서 시원하고 쾌적한 보행이 가능해진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의 경험이다. 도시 공간의 폭염 대책으로 녹음 제공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우리나라 도시의 가로수는 기후위기 시대에 든든한 시민의 방패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장기적으로 어떤 전략을 세우고, 가로수를 심고 가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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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로수 없거나 적어 시민들 고통
나무가 자랄 식생 기반 마련하고
공원·녹지와 민간토지 활용해야
」
나무는 토양 기반에서 자라는 생물이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적정 식생 기반을 갖춰줘야 한다. 자연 지반에 심으면 최선이지만, 사람도 흙을 밟기 쉽지 않은 대도시에서 나무들이 그런 여건이 갖춘 지반을 만날 확률은 아주 낮다. 큰 나무가 뿌리를 뻗고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면서 살아가려면 흙의 부피가 보장돼야 한다. 그런데 최소 토심만 충족하는 수준에서 나무를 심는 경우가 다반사다. 도시에는 포장된 면이 많아서 내리는 비가 땅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우수관과 배수관을 통해 배출된다. 유기질이 땅으로 흡수될 일이 적으니 흙에 분해자가 충분할 리가 없다.
결국 우리 도시에서는 척박한 토양 기반에서 가로수를 키우고 있으니, 이런 푸대접에도 꿋꿋하게 자라는 가로수가 대견할 뿐이다. 자연환경처럼 이상적인 조건은 아니더라도 도시환경 속에서도 흙의 깊이·부피·성분 등을 고려해야 한다. 빗물이 흡수되고, 배수될 수 있는 등 최소 조건을 갖춰줘야 한다. 땅속의 일이라 보이지 않더라도 도시계획 입안자와 도시 관리자가 크게 신경 써야 할 기본 항목이다.
가로수의 역할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역할은 도로의 안전성과 쾌적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특징적인 도시경관을 연출하는 상징적 역할도 많이 거론된다. 기후위기의 시대를 맞아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공기를 정화하는 역할까지 추가됐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마다 가로수를 특화하겠다거나, 더 많이 심겠다거나 하는 포부를 내세운다. 폭염이라는 지구적 자연 재난을 줄이기 위해 가로수에 시민의 방패 역할을 부여하겠다면, 수종이나 수량 고민뿐 아니라 어떻게 그늘을 최대치로 확대할지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전략 구축에는 가로수만 고려할 이유는 없다. 공원·녹지뿐 아니라 민간이 보유한 토지의 공개 공지, 개방형 녹지 등과도 연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공간 여건, 기존 가로수의 성능, 도입할 수종의 그늘 형성 능력 등을 고려해 도시의 ‘녹색 양산’을 어떻게 배치해 목표한 효과를 얻을 것인지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이미 다 자란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은 비용이나 생육 측면에서 불리하니 나무가 자라는 시간을 고려하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 심기보다 키우기가 더 어렵다. 제 모습으로 건강하게 자란 나무가 좋은 나무다. 모든 나무는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원래 수형으로 자란 나무는 쾌적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도시 환경은 나무들에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다. 인간의 필요 때문에 도시로 옮겨진 나무들은 돌봄과 가꿈이 필요하다. 옮겨진 나무들이 잘 가꿔져서 건강하게 활착하게 되면 나무가 제공하는 혜택은 고스란히 우리가 받게 된다. 가로수의 강전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도시경관의 품격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나무가 주는 그늘의 혜택을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기 때문이다.
비용이나 이해 관계상 어려움이 있겠지만, 가로수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시민의 공감과 전문적 관리가 절실하다. 다른 나라의 풍성한 가로수를 부러워하는 언론 보도를 종종 본다. 우리 나무들이 그렇게 못 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돌보고 키우지 않았을 뿐이다. 66년 만에 6월 최고 고온 기록을 경신하며 올해 첫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날 정오에 서울 덕수궁 정동길을 걸었다. 나무들은 싱그럽고 쾌적한 무대를 제공해줬고, 많은 보행자는 그 더운 날씨에도 표정들이 밝았다. 폭염 아래에서 쾌적한 보행권을 지켜줄 보호막은 건강하게 자란 나무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욱주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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