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의 시선]핵연료 처분장 선정 절차 시작해야

김원배 2024. 8. 2. 00: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원배 논설위원

현재 국내 원전은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를 내부에 저장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에 해당한다. 그런데 2030년이 되면 포화가 시작된다. 내부 저장 시설이 꽉 차면 새 연료를 장전할 수 없기 때문에 원전 가동을 못 하게 된다. 사용후핵연료는 언젠가 적절한 장소에 영구 격리 처분해야 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022년 원자력 발전을 친환경 에너지에 포함하는 택소노미(분류체계)를 발표하면서 ‘회원국은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세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한국수력원자력이 EU 회원국인 체코의 두코바니 원전 건설 사업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추가 수주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고준위 처분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원전 수출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 EU, 2050년까지 세부 계획 요구
국내 원전 보관 2030년에 포화
현 계획으론 37년 뒤에나 확보

현재 가동되고 있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의 모습. 이 지역에 추가로 지을 원전 5,6호기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이 선정됐다. [AP=연합뉴스]

2003년 후보지였던 부안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던 것을 봐도 부지 선정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일로 고준위 처분장은 무산되고 중·저준위만 따로 떼어내 경주에 건설됐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여야 대립이 심각해 언제 통과될지 불투명하다.

다만 특별법이 아닌 현재의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에 따라 절차를 진행할 수도 있다. 관리법은 5년 단위의 기본계획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만든 2021년 2차 기본계획을 보면 ▶부지 선정 착수부터 13년 안에 부지를 확보하고 ▶20년째 중간저장시설을 만들며 ▶37년 안에 처분장을 확보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올해 시작한다고 해도 2060년 이후에나 고준위 처분장을 만들 수 있다. 핀란드 서부 올킬루오토섬 지하에 있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내년 가동을 앞두고 있다. 핀란드 정부가 부지 조사에 착수한 것이 1983년이니 가동까지 42년이나 걸린 셈이다.

핀란드 올킬루오토섬에 건설 중인 세계 최초의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리시설인 ‘온칼로’ 공사 현장. [사진 포시바]


2차 기본계획의 원칙 중 하나는 원자력 발전의 혜택을 향유한 현세대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책임을 부담하고, 관리 비용은 발생자가 부담한다는 것이다. 고준위 처분장을 계속 미루는 것은 미래 세대에 짐을 떠넘기는 행위다.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로 가정과 사무실, 공장의 불을 밝혔고 기계를 돌려 수출품을 만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원전은 방사성폐기물을 남기는 만큼 국내에 고준위 처분장을 만들어야 한다. 설령 후일 국민적 합의로 탈원전을 한다고 해도 처분장이 필요하다. 어차피 만들어야 한다면 2050년까지 EU 택소노미에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법 제정을 통해 처분장 확보 기간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도 원전 수출에는 적극 나서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도 고준위 처분장 문제가 원전 수출의 발목을 잡도록 해서는 안 된다. 꼭 원전 수출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은 국내 원전에서 나온 전기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처분장을 제때 짓지 못하면 더 까다로운 규제를 받을 빌미가 될 수도 있다.

때마침 한국원자력학회가 ‘한국형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솔루션’을 발표했다. 사용후핵연료를 구리와 주철로 만든 이중 처분 용기에 담아, 지하 500m 깊이의 화강암반에 설치한 시설에 처분하는 방식이다. 스웨덴·핀란드 방식과 개념적으로 같지만 국내 실정과 최신 기술을 반영했다. 안전성이 확보되는 수준에서 처분 용기의 두께를 줄이고 더 많은 다발을 넣어 처분장 면적과 비용을 줄이자는 내용이다.

정범진 한국원자력학회장(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은 “유럽이 시행하는 EU 택소노미 조건을 달성해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원전 수출의 걸림돌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며 “이제는 해결책 중심으로 연구를 해서 논의를 좁혀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원자력학회의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해결책 도출을 위해 구체안을 갖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경주에 건설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하지만 사용후핵연료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아직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사진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2016년 1차 기본계획은 시작 후 36년 안에 고준위 처분장을 확보하는 내용이었다. 수정된 2차 기본계획은 공론화만 한 번 더 했을 뿐 큰 진전이 없었다. 실행 못 한 단순 계획으로는 EU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 이렇게 5년마다 기본계획만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절차를 시작하면 첫해엔 조사 계획을 수립하고 부적합한 지역은 먼저 배제하는 작업을 한다. 이젠 어떻게든 발걸음을 떼야 한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