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국내 기술로 뇌전증 치료 특효약 원료 시장에 도전

최준호 2024. 8. 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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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70〉 네오켄바이오 함정엽 대표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흰 가운을 입고 온실에 들어가긴 처음이었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 73㎡ 규모의 좁은 온실 안, 무릎 높이의 데크 위에서 자라고 있는 짙푸른 ‘식물’ 500주 줄기마다 QR코드가 붙어있고, 8개의 감시 카메라가 온실 벽을 따라 달려있었다. 삼엄한 ‘특급 대우’를 받고 있는 이 식물의 이름은 ‘대마’였다. 흰가운을 입는 이유는 혹시라도 잎이나 꽃이 외부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란다. 그러고 보니 가운에 주머니가 하나도 없었다.

임하면에서 37㎞ 떨어진 풍산리에 자리잡은 경북바이오산업연구원을 찾았다. 건물에는 대마에서 원료 의약품을 추출하는 생산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2m 높이의 설비 안에 대형 압력밥솥처럼 생긴 장치가 보였다. 대마를 에탄올과 함께 넣고 고온·고압에 초단파까지 쏴 엑기스를 뽑아내는 기계다. 이렇게 얻은 검은색 액체에서 분리·정제과정을 통해 흰색 분말을 얻어낸다. 글로벌제약사 GW파마슈티컬만이 만들고 있는 뇌전증 치료 특효약 에피디올렉스의 원료가 되는 CBD(칸나비디올)였다. 뇌전증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6500만 명, 국내에도 40만 명에 달한다. 대마 스마트팜과 가공시설의 주인은 202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출자회사로 설립된 스타트업 네오켄바이오. KIST천연물연구소에서 관련 연구를 해온 함정엽(57) 책임연구원이 창업한 기업이다. KIST의 특허기술을 이용해 고순도의 CBD를 제조하는 국내 최초의 기업이다. 창업 4년차에 불과하지만, 누적 투자 유치가 150억원에 달하고, 지난해 5월엔 중소벤처기업부 지정 ‘아기유니콘’에도 선정됐다. 아기유니콘이란 빠르게 성장하며 미래에 큰 성공을 거둘 잠재력이 있는 신생 스타트업을 의미한다. 현행법상 마약으로 분류되고 있는 대마를 국내에서 재배하고 가공할 수 있는 건 2020년 이 지역 일대가 ‘경북산업용헴프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산업용 대마 재배와 관련 의약품 개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안동을 찾아 함정엽 대표를 만났다. 그의 곁에는 최고운영책임자(CSO)를 담당하고 있는 ‘창업 동지’ 김정국(55) 사장이 있었다.

「 KIST에서 출발한 의약 스타트업
의료용 대마에서 치료물질 추출
국내선 관련법 개정 늦춰져 애로
해외 합작, 현지 생산으로 돌파구

네오켄바이오의 공동창업자인 함정엽 대표(CEO·오른쪽)와 김정국 사장(CSO)이 KIST 특허기술로 만든 마이크로웨이브 제조 설비 앞에 섰다. 전민규 기자

Q : 헴프규제자유특구란 말이 생소하다.
A : “헴프(Hemp)는 산업·의료용 대마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삼베를 만들기 위해 전통적으로 재배해온 대마가 바로 헴프다.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마리화나와 다른 것이다. 환각·중독성이 없어, 섬유·화장품·의약품 등 다양한 산업 용도로 사용된다. 헴프규제자유특구란 정부가 경북 안동과 경산 일대 6개 지역에서 산업용 헴프를 재배하고, 원료의약품 제조와 수출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예외적으로 풀어준 지역을 말한다.”

Q : 과학자가 왜 창업에 나섰나.
A : “그간 KIST에서 크고 작은 기술 이전을 여러 번 했지만, 해당 기업이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정부의 산업융합 기반 구축사업 책임자를 맡아 기업 지원 업무를 진행하면서 기술상용화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게 됐다. 마침 당시에 천연물 연구의 일종으로 헴프의 중요성과 학술적 가치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기술 이전이 아니라 직접 회사를 세워, 국내 최초의 의료용 대마 기업을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Q : 공동 창업인데, 어떤 인연인가.
A : “막상 혼자 창업을 준비하다 보니 기술적 부분과 달리 투자 유치와 기업 경영에 대한 막막함이 갑자기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 와중에 한 통의 이메일을 받게 됐다. 당시 투자사 대표이면서 헴프에 대한 관심이 많은 김정국 사장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투자 등 창업 준비를 상담하다가 의기투합해 같이 창업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신재민 기자

공동창업자인 두 사람은 이과·문과로 달랐지만, 오래된 친구 사이처럼 잘 어울렸다. 처음 만난 식사 자리에서 소주 네 병을 나눠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함 대표는 해양천연물화학을 전공하고 평생 연구만 해온 천상 이과지만, 김 사장은 학부에선 심리학을, 대학원에선 기술경영을 전공하고, 기업과 투자사를 거쳐온 문과 출신 전문경영인이다.

국내에만 뇌전증 환자 40만 명

Q : 왜 의료용 대마인가.
A : “KIST 천연물연구소는 그간 의약품이 될 수 있는 천연물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천연물이 화학적 의약품에 비하여 효능이 낮다보니 기능성 소재로만 사용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헴프 추출물을 정제해 얻는 칸나비디올(CBD)은 소아 뇌전증 치료제로 사용되는 에피디올렉스의 원료의약품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 대마초는 금기어에 가깝다. 잊을 만 하면 연예인 등 유명인의 대마초 흡연과 구속 사건이 뉴스화된다. 대마초를 키우다 경찰서에 잡혀 온 사람들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하지만 산업·의료용 대마 헴프와 환각·중독 성분이 있는 마리화나는 엄연히 다르다. 많은 서구 국가에선 의료용 대마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 38개주, 영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27개국 등 세계적으로 의료용 대마 합법화 국가는 56개국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에 환각성과 중독성이 없다고 밝혀진 CBD까지 마약으로 취급해 의료용 대마를 통한 CBD 관련 시장의 진입이 어렵다. 2020년 ‘경북산업용헴프규제자유특구사업’이 생겼지만, 참여 기업들의 국내 시장 진입은 물론 수출도 어려운 실정이다. 실증 특례 기간이 오는 11월 끝날 예정인 것도 부담이다.

Q : 관련법 개정 없이 특구 사업이 끝나면 네오켄바이오는 어떻게 되나.
A : “우선은 임시허가 단계로 연계되는 것이 제일이지만, 안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현재 안동에서 신규 규제자유특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둘 다 안 된다면 국내에선 화장품 원료 등 비마약성으로 분류된 소재 사업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과 태국 등 외국과는 조인트벤처를 통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Q : 글로벌 경쟁은 어느 정도인가.
A : “헴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은 국내에서는 네오켄바이오가 유일하다. 하지만 해외는 다르다. 이미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얻어 의약품으로 판매가 되는 에피디올렉스의 제조사인 GW 파마슈티컬은 의료용 대마 업계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회사다. 그런데 이 GW도 2021년에 재즈 파마슈티컬에 인수·합병(M&A)될 정도로 세계 의료용 대마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네오켄바이오는 점차 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에 중점을 두고 선도적 회사가 되고자 한다. 글로벌 시장 진입과 성장을 위해서는 회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 정책의 변화와 도움도 절실하다.”

Q : 향후 계획은.
A : “우선 원료의약품급 CBD를 제조하고, 판매하기 위한 GMP(제조품질관리기준) 설비 구축이 필요하다. 하지만 관련 국내 규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GMP 설비 구축을 위한 본격 투자를 하기가 어렵다. 대안으로 임시허가 단계로 전환을 통해 생산된 국내산 CBD 원료를 수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5월엔 태국에 조인트벤처까지 설립했다. 네오켄바이오의 비전은 글로벌화다. 한국보다 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할 생각이다. 결국 이런 노력들이 궁극적으로 의료용 대마 치료제의 국산화를 앞당기게 되고, 난치병 환자와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형동 국회의원(국민의힘, 경북 안동·예천)

“세계 주요 50개국 이상의 나라가 의료용 대마 사용을 허용하고 있는 추세다. 의료용 대마까지 마약으로 취급하는 것은 비과학적일뿐 아니라, 산업과 경제 발전에도 저해된다. 규제의 적합성을 잘 따져 관련 법률을 빨리 고쳐야 한다.”


김승우 메디톡스벤처투자 부사장

“네오켄바이오의 근간이 되는 기술은 헴프의 칸나비노이드 성분 분리 추출을 위한 마이크로웨이브 가공기술이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경쟁사가 사용하고 있는 초임계 추출법과 비교해 장점이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이크로웨이브 가공기술을 상업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업체는 전세계에서 네오켄바이오가 유일하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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