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청라언덕이 키운 예술 자부심, 한국전쟁 때 꺾여

2024. 8. 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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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민족주의와 이인성


김인혜 미술사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 생각’. 많은 한국인이 기억하는 가곡일 것이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청라 언덕’은 대구 중구에 있다. 원래 이름은 달성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산’이었다. 그런데 개화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언덕에 주택을 지으면서 서양 담쟁이를 심었다. 붉은 벽돌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담쟁이, 즉 ‘청라(靑蘿)’를 처음 본 대구 사람들은 이 신기한 식물이 담장을 뒤덮은 동네를 청라 언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온 대구가 나서 예술 인재 키우기
우리 땅 향수 강한 화풍으로 결실

청라 언덕서 그린 계산 성당 ‘성탑’
가곡 ‘동무 생각’의 감수성 묻어나

일본서 돌아와 차린 다방 아르스
백석 등과 어울렸던 예술 아지트

‘성탑’, 1930년대, 개인 소장. 청라 언덕에서 계산 성당과 제일교회의 첨탑을 그린 작품이다.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동무 생각’은 대구 출신의 작곡가 박태준(1901~1986)의 첫사랑 기억을 담은 노래다. 박태준은 청라 언덕 아래 옛 제일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아 음악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시대는 근대화의 물결이 넘쳤고,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가 이인성도 그와 비슷한 세대로, 서로 매우 친했다. 동요작가 윤복진과 더불어 가요곡집 ‘물새 발자옥’(1939)을 만든 적도 있다. 작곡 박태준, 작사 윤복진, 표지그림 이인성. 이들은 모두 1920~30년대 대구 문예계의 촉망받는 신예들이었다.

화면 구성 대담하게 요리하듯

청라 언덕에서 바라본 계산 성당의 실제 모습.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이인성도 청라 언덕에서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 제작된 ‘성탑’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올라서 대구 계산 성당을 내려다보며 그렸다. 성당의 정면부 전체를 반듯하게 화폭에 담기 위해서, 화가는 언덕에 올라가야 했을 것이다. 작품을 보면, 계산 성당 첨탑 뒤로 또 하나의 은색 첨탑이 겹쳐 있는데, 이것이 박태준을 처음 서양음악으로 인도했다는 그 제일교회의 첨탑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그렸을 장소를 찾아 청라 언덕에 올라가 봤다. 그림을 그린 위치와 성당이 생각보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인성은 깊은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의 오른쪽에 근경의 나뭇가지를 배치했다. 마치 세잔이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릴 때, 근경에 나무를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 방법이다. 바로 눈앞의 나뭇가지를 화면에 일부러 집어넣음으로써, 저 멀리 위치한 계산 성당과 그 너머 공간까지 깊이 있는 공간감을 확보했다. 화면 아래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유난히 작은 것도 거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방식이다.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요리하듯 주무르는 능력이 이인성에게는 있었다. 또한, 이인성의 작품에는 ‘느낌’이란 게 있다. 노래 ‘동무 생각’에서와 같은 풍부한 감수성이 묻어 있다. ‘성탑’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마저 내린 듯, 겨울의 차갑고 습윤한 공기를 머금었다. 뭔가 쓸쓸한 느낌이 사무치는 작품이다.

‘계산 성당’, 193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계산 성당 앞의 이인성 나무. 감나무다.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계산 성당은 1902년 대구에 처음 생긴 서양식 건축물. 당시 대구에는 벽돌집을 만드는 기술자가 없어서 건축을 맡은 프랑스 신부가 중국인 벽돌공을 데리고 와서 지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대구에서 가장 압도적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지녔을 이 성당을 이인성은 여러 번 그렸다. 그의 화실이 바로 근처 남산병원 3층에 있었기 때문에, 화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계산 성당의 옆모습을 그린 작품(‘계산 성당’)도 남아 있다. 기와지붕들 너머에 붉게 빛나는 벽돌 건물. 그 사이로 나무 한 그루가 앙상하게 서 있는데, 현재 계산 성당 앞의 감나무를 이 그림 속 나무라고 해서 ‘이인성 나무’라 이름 붙여 놓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인성의 작품을 기억하려는 대구 시민의 노력이 반가웠다.

국채보상운동 토양서 성장

일제 치하 미술·문학 운동을 펼쳤던 영과회 회원들. 조양회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 맨 왼쪽이 이인성, 뒷줄 왼쪽부터 김용준·이상화·서동진.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이인성은 대구가 낳은 화가였다. 20세기 대구에는 실로 훌륭한 예술가가 많이 나왔지만, 이인성은 특히 대구라는 토양이 없었다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12년 대구 중구 서성로(당시 지명은 북내정 16)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상 화가를 꿈꿀 수 없는 처지였지만, 대구 어른들이 나서서 그의 성장을 도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에 비상한 재주를 보인 이인성을 길거리 캐스팅한 사람이 스승 서동진이었다. 서동진은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이인성을 자신이 운영한 인쇄소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켜서, 숙식을 제공하며 일과 미술 공부를 병행하게 했다. 이인성의 일본 유학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서동진의 스승으로는 이상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대단한 독립운동가이자, 대구에 최초로 서양화 화구를 도입했던 화가였다. 한편, 이상정과 이상화 형제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의 영향 아래 자랐는데, 이일우는 개화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학교 우현서루(후에 교남학교로 발전)를 처음 설립한 인물. 국채보상운동의 주동자 중 하나였다. 알다시피 국채보상운동은 나랏빚을 온 국민의 성금으로 갚겠다고 나선 일로, 1907년 대구에서 처음 촉발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운동이었다. 그러니까, 이인성으로 말하자면, 이일우-이상정-이상화-서동진의 계보를 이었던 것. 그는 대구의 지사(志士)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아르스 다방의 예술가들. 왼쪽부터 의사이자 수필가 정근양, 무용가 조택원, 화가 이인성, 시인 백석. 1938년 12월 사진이다.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1927년 대구의 문예계 인사들이 ‘영과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는데, 기념사진에 어린 이인성과 서동진·이상화 등이 함께 등장한다. 사진의 배경이 된 건물은, 대구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사비를 털어 만든 조양회관. 이곳에서 이들은 1920년대부터 전시회를 열고, 대중 강연을 펼치며, 식민지 시대에도 미술과 문학을 통해 우리 정신을 지키고 고양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인성의 작품을 보면, 잃어버린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과 향수가 늘 강하게 묻어나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인성의 민족주의적 태도는 대구라는 토양에서 뿌리내리고 자란 결과였다.

이들의 자취가 대구 중구 여기저기 남아 있다는 점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이일우의 우현서루는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자리에 있고, 이상정 고택은 계산 성당 바로 근처에 현재 ‘바보 주막’이라는 밥집으로 변해있다. 이상화 고택은 바보 주막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나온다. 가옥과 마당이 어느 정도 원형 보존되고 있다.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는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 서상돈의 고택이다. 서동진의 집과 그가 운영했던 대구미술사 자리도 거기에서 멀지 않다. ‘올드 대구’가 크지 않다 보니, 모두가 서로 지척이다. 이인성은 또래 예술가들과 어울려, 이상화의 집을 비롯해 이집 저집 동네 어른들 댁을 찾아다니기를 즐겼다고 한다. 대구 중구는 현재 이 일대에 골목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치안대원 잘못 쏜 총에 숨져

정원’, 1938년, 개인 소장. 한여름 아르스 다방의 풍성한 정원을 싱그럽게 그렸다. [사진 김인혜, 이인성 유족]

이인성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창 잘 나갈 때, 그는 의사였던 장인이 마련해 준 화실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1937년 처가에서 분가해 대구 중구 남일동(당시 지명 남정 76)에 다방 ‘아르스(ARS)’를 열었다. 라틴어로 ‘예술(ART)’을 의미하는 이름. 당시 다방은 음악 감상실이자 도서실, 갤러리였고, 이인성의 표현대로 “예술의 전당”이었다. 이인성이 직접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 다방 벽에는, 그의 작품 ‘한정’이 걸려 있었다. 다방 내부 사진을 보면, 프랑스에서 갓 귀국한 무용가 조택원이 시인 백석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아르스가 실제로 예술가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 현재 옛 제일교회 건물 맞은편에 아르스를 재현한 공간이 들어설 계획이라 한다. 대구 중구청이 유족의 도움을 받아 올해 말 개관을 목표로 한창 추진 중인 사업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이인성이 해방 후 서울로 올라가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6·25 전쟁 중 비명횡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50년 11월, 전쟁 중 치안대원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향년 38세. 이인성은 그냥 이인성이 아니다.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우겠다는 대구의 열렬한 교육열 속에서, 여러 지사들, 유지들, 장인어른의 도움과 희생을 등에 업고, 겨우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다. 그런 소중한 꽃을 피우기는 어려운데, 꺾기는 참 쉽다. 우리 역사에는 그런 인물이 또 얼마나 많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대구의 쨍쨍한 여름과 싸우듯 골목을 걸었다.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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