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향 ASMR 체험기
외로웠다.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럴 땐 ASMR을 수면 유도제로 사용하곤 했다. 주로 빗소리나 장작 타는 소리처럼 귀를 자극하는 소리를 집중적으로 들려주는 ‘팅글 ASMR’을 즐겨왔다. 그러던 어느 밤, ASMR의 세계를 하염없이 유영하던 내 눈길을 사로잡은 ‘여성향’이라는 키워드. 그 뒤에 덧붙여진 제목. ‘연하남이 알려주는 첫경험 롤 플레잉’. 파격적이었다. 아주 깊은 심해 어딘가 숨겨져 있던 콘텐츠를 발견한 기분! 우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눈을 감고 들었다. 꿀 떨어지는 목소리의 남성이 대뜸 “누나, 언제 왔어요? 이리 와봐”라면서 나를 이끌었다. 공기 반 소리 반인 음성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일단 모른 척 귀를 기울였다. 그는 본격적으로 서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사를 읊으며 애무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 분위기를 한껏 달아오르게 만들더니 “걱정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라고 말했고, 틈틈이 “좋아요? 내가 더 괴롭혀줘도 돼?”라는 대사를 읊었다. 신음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홀연히 남성의 목소리는 사라져버린다. ‘마무리 멘트’ 같은 것도 없이. 10분가량 이어진 연하남의 격정적인 롤 플레잉은 숙면을 돕기는커녕 나를 맑은 정신으로 깨워놨다. 등은 땀으로 축축했고 입은 바싹 말라 텁텁했으며, 두 눈은 말똥말똥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내 모든 감각을 폭풍처럼 휩쓸고 간 이 신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몰입감이 굉장한데? 나는 곱씹었다. 지금까지 내 섹슈얼한 감성을 자극하고 감각을 곤두서게 만든 것에 대하여. 남성과의 직접적인 스킨십이나 끈적한 눈빛, 야한 대화가 아니고는 대부분 수위가 높은 영상물이나 이미지처럼 시각에 의존한 것들이었다. 특히 디지털 매체에서의 오감은 가장 표면적이고 즉각적 감각인 시각을 중심으로 피어올랐다. 청각이나 여타의 감각은 부수적일 뿐. 하지만 여성향 ASMR은 오직 소리로만 오감을 자극했다.
특히 역할극 형태의 ASMR은 오직 청각적 전달을 통해 서사적 배경을 설정하고, 각 배경을 표현할 수 있는 청각적 요소를 설치해 후각과 미각, 촉각, 공감각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연하남이 알려주는 첫경험 롤 플레잉’을 들은 후 재생시킨 영상에서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손가락 넣어본 적 있어?’ ‘비 오는 날 남친과 XX’ 등의 ASMR. 이런 영상에서 구현되는 소리에는 청자가 특정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채로운 청각 장치가 동원됐다. 손가락으로 물을 튕기거나 슬라임처럼 진득한 무언가를 만지는 소리,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빗소리와 적절한 선곡, 들숨과 날숨을 제때 적절히 섞어주는 센스까지. 이 모든 소리는 예민한 감성을 더욱 자극시켰다. 여기에 친절하고 센스 넘치게 여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완벽하게 짜인 대사. 귀 기울여 듣다가 문득 든 생각. ‘완전히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콘텐츠다.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깊숙한 곳에 갇혀 있던 나만의 로맨스 욕망이 채워지고 있구나.’ 통상적으로 자주 보이는 성인 동영상 콘텐츠의 서사가 결론이 정해져 있고 그 결론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형태라면, 여성향 ASMR은 그와 달랐다. 상황만 존재할 뿐 결론은 없었다. 상황에서 여성이 지향하는 것, 즉 섬세함과 감성이 대사나 소리 표현 장치, 성우에 견줘도 될 만큼 듣기 좋은 음성에 담겨 있어 성적인 것 이면의 세포 한 개 한 개에 감춰진 내밀한 감각을 건드렸다. 마치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처럼. 이런 정성과 함께 내가 대접받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세계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고자 제목을 살피며 취향에 맞춰 골라 들어봤다. ‘남자친구 애교 시키기’ ‘그녀를 녹이는 마사지’ ‘너에게 달콤한 아침을’ ‘귀여운 남친이 목소리로’ 등등…. 모든 서사가 ‘그녀의 욕망’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여성인 나를 위해 신음하고,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 강압적이고 정복하려는 남성 권력이 완전히 배제된 서사였다. 이 세계를 알기 전 내가 알고 있던, 성별 관계없이 통상적으로 알려진 성인 콘텐츠에서는 늘 여자 신음이 난무했고, 그 소리는 상대 남성에게 헌신하는 듯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스쳤다. 몰랐던, 아니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대부분의 성인 콘텐츠에서 남성이 성적으로 우위에 있는 구도가 만들어졌고, 여성의 신음은 그 구도를 더욱 심화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여성향 ASMR은 남성 권력으로 얼룩지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는 성인 콘텐츠, 즉 젠더가 전복된 콘텐츠였다. 그 권력을 내가 쥔 느낌이 강렬했다.
그렇다면 이 콘텐츠를 쥐고 흔드는 각본을 쓰는 건 누구일까? 여성향 ASMR은 대본 작가를 고용하고, 채널의 주인은 성우 역할만 제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본 작가 모집 공고 글에 따르면 자격 요건에서 성별은 무관, 우대 사항은 단 한 가지. 롤 플레잉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일 뿐이었다. 채널의 주인 역시 정체가 불확실했다. ASMR 방송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스타트업 기업에 소속된 경우도 있었으며, 완벽하게 자신을 숨기고 웹툰 작품에서 잘생긴 ‘남주’를 표현한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 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알고 보면 여성향 ASMR 제작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비밀스럽게 감춰진 채널 상태를 확인한 후 나는 묘한 안정감을 얻었고, 더욱 마음 편하게 콘텐츠를 음미했다. 그렇다면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확실한 건 조회 수에 기록된 수백만의 숫자처럼 다른 여성들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고, 지속적으로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쾌락 판타지를 만족시켜 주고, 다채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며, 비밀스러운 취미가 되는 이 콘텐츠. 다양한 기능을 갖춘 여성향 ASMR은 이제 내게 가장 근본적인 목적으로서 사용된다. 평온한 숙면. 그렇게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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