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버린 '쓰레기' 먹었던 한국 여성 노동자들
[김종성 기자]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노동력 이동이 대규모로 진행됐다. 일본의 식민지배정책으로 한국 산업이 피폐해져 한국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힘들어진 결과다.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39년의 국민징용령에 의한 강제징용 이전에는 그런 현상으로 인해 노동력이 일본으로 이동했다. 식민지 한국이 원료 공급지 및 상품 소비지뿐 아니라 노동력 공급지로도 전락했던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일본 경제가 급성장한 원동력 중 하나를 알려주는 그 현상을 담은 다큐영화가 30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언론·배급 시사회를 가진 <조선인 여공의 노래>다.
이원식 감독이 만든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절충해 대한제국 멸망 직후인 1910년대부터 오사카로 이주해 기시와다방적(키시와다방적) 등에 들어간 한국인 직공들의 애환을 들려준다.
▲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 이미지. |
ⓒ (주)시네마달 |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실제로 오사카에서 일했던 세 명의 한국인을 등장시킨다. 1910년대에 이주한 노동자들을 출연시킬 수는 없으므로 영화에는 1930년대 이후에 이주한 한국인들이 나온다. 1936년부터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노동한 신남숙 할머니, 이듬해부터 노동한 김상남 할머니, 재일한국인 2세로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노동한 김순자 할머니가 그분들이다.
영화는 이들의 증언을 직접 들려주기도 하고, 재일 4세인 강하나·조청향·조사량 배우 등이 재연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학자이자 목사인 히구치 요이치 같은 전문가들도 화면에 나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해설해준다.
1910년대 오사카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빈민 출신의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다. 영화는 1913년 12월 26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을 인용해 "오사카 지역 방적회사에서는 조선 여자를 많이 쓰고 있다"며 한국인 수십 명을 고용한 곳도 있었고 대여섯 명을 고용한 곳도 많았다고 알려준다. 이 기사가 나온 뒤에는 '조선방적'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인을 대거 고용한 기시와다 방적공장이 두각을 보였다. 영화는 내래이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 여공이 가장 많이 있었던 곳은 이곳 기시와다방적공장이었다. 1919년부터 공장이 문을 닫은 1941년까지 약 3만 명이 넘는 조선인 여공들이 일했다. 그래서 조선방적이라고까지 불렸다."
일본으로 대거 이동한 한국인 직공들은 그 이후의 강제징용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노동 환경으로 내몰렸다. 일본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동원만 당하지 않았을 뿐이지, 입사한 이후의 상황은 강제징용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일단, 노동의 강도가 너무 심했다. 중노동이란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야간 시간에도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노동했던 당시 12세의 소녀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자정 무렵부터는 지옥이었어요. 앞치마 주머니 안에 사탕을 넣어두고 졸음이 오면 빨아먹으면서 일했어요."
그렇게 졸면서 일하다가 실이라도 끊어지면 현장 감독들이 가차없이 매질을 했다. 이런 구타는 어린 한국인들에게 거의 일상이었다.
▲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 이미지. |
ⓒ (주)시네마달 |
오사카의 한국인 직공들은 주로 10대 초반에서 20대였다.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공장 측은 형편없는 식사를 내놓았다. 고구마죽만 줄 때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음식도 신속히 먹지 않으면 안 됐다.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그 시간 내에 어린 여성들이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 넣는 모습이 오사카 공장들의 점심 시간 풍경이었다.
누구라도 일본으로 처음 건너갈 때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부쳐드려야지'라고 결심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금전 관리를 잘 못해서가 아니다. 감염이 용이한 생활환경에 처하다 보니 예측치 못한 병원비가 나가는 일도 있었다. 공장에서 주는 음식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휴일에 바깥에 나가 음식을 사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깥 음식을 먹는다 해도 일반적인 음식을 먹기는 힘들었다. 식당 주인들의 차별이 노골적이었다. 한국인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조센징'으로 대하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비교적 용이하게 배를 채우는 방법은 일본인들이 못 먹겠다며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육류 내장을 모아 구워 먹는 것이었다. 영화는 여성 노동자 셋이 물가에서 육류 내장을 구워 먹으며 즐거워 하는 모습을 재연 연기로 보여준다. 그 음식은 '호루몬', 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였다. 훗날 일본인들도 맛을 보게 되면서 지금은 이것이 일본의 인기 음식이 됐다고 영화는 말한다.
공장 측은 고된 중노동과 형편없는 식사뿐 아니라 또 다른 방법으로도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기숙사 한 방에 여러 명을 집어넣으면서도 위생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공들은 불결한 이불을 덥어야 했다. 그래서 전염병도 빈발했다. "제발 약 좀 뿌려달라"고 요구해도 회사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예산이 없다며 "차라리 빈대한테 나를 물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빠를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전염병이 더 심해지면, 회사는 인권침해적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여성들을 널찍한 곳에 모아놓고 이들의 몸을 집단적으로 소독하는 일도 있었다. 기계 부품을 소독하듯 인간을 소독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그렇게 취급했으니 외출이나 휴가도 제대로 시켜줄 리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며 집에 보내달라 애원해도 거짓말 말라는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았다. 노동자들이 혹시라도 도주할까봐 담장은 높게 세워지고 심지어 철조망도 쳐졌다.
기시와다방적의 경우에는 공장 건물과 도로 건너편 기숙사를 연결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공장 대문을 열고 도로를 건너 기숙사로 가지 말고 지하통로로 다니라는 것이었다. 도망자를 예방하는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영화는 해석한다.
▲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 이미지. |
ⓒ (주)시네마달 |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단결해 파업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경찰력이 투입돼 사측을 보호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었다. 이런 파업 때 제기된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보면 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임금 삭감을 철회할 것. 통근수당·주택수당·식비를 줄 것, 점심·저녁 때 30분간 휴식을 줄 것, 목욕시설·세탁실 마련해줄 것, 식당·위생설비를 마련해줄 것, 기숙사의 침구는 여름용·겨울용 두 가지를 지급해줄 것, 전기 코드를 길게 해주고 겨울에는 화로를 설치해줄 것, 업무 시간을 연장하지 말 것, 외출·편지·면회 자유, 퇴직수당 지급."
일본 기업과 경찰은 이런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도리어 중노동과 인권착취에 더해 성폭행을 자행하고 강제결혼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한국인 폭력단체인 상애회도 이런 데에 가세했다. 이 단체 회원들은 공장 감독으로 파견돼 노동착취와 인권탄압을 거들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기업과 일본 국가와 친일세력에 둘러싸여 1 대 3의 불리한 구도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들은 얼마 되지 않은 휴식 시간을 쪼개 한글을 공부하고 단결을 배워갔다. 그들에게 한글 공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게 일하며 싸우다가 죽으면 회사는 노동자들의 동요를 우려해 시신을 거적으로 덮은 채 약식 장례식을 거행한 뒤 회사 밖으로 얼른 내보냈다.
20세기 초반의 일본 경제는 이런 한국인들의 수난과 희생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강제징용이 실시돼 한국인 노동력이 보다 손쉽게 일본으로 옮겨졌다. 한국인들이 피와 땀이 일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영화 속의 일본인 학자는 말한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
밤중에 한밤중에 깊은 잠 들 때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뜨고 머리 빗으며 세수하고
식당에 가면 먹을 시간 없어 된장에 밥 말아 쑤셔 넣듯 먹고
공장으로 가면 먼지가 하얀 산 같이 일어나고
전등을 태양 삼아 산 같은 하타를 끼고 시간이 되어
기숙사 돌아가면 빈방에 들어가네
그래도 우리 또 하루를 살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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