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자유 영혼, 허균의 못다 한 마지막 말
[이준목 기자]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여류 시인 허난설헌(허초희)의 친동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시, 산문, 비평 등 수많은 저술을 남기며 '조선에서 글로서 허균을 따를 자가 없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당대의 문장가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말년의 허균은 '만고의 역적'이라는 온갖 악평과 비난을 들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시대를 앞서나간 허균의 자유분방한 사상과 파격적인 행보, 그리고 석연치 않은 몰락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엇갈린 해석을 낳고 있다. 과연 허균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였을까. 아니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철없는 이상주의자였을까.
지난 7월 3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9회에서는 '홍길동전을 남긴 천재, 허균은 왜 만고의 역적이 되어 죽었나' 편을 통해 허균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 방송 갈무리 |
ⓒ tvN |
허균은 1569년(선조2년) 11월, 당대의 명문가였던 양천 허씨 가문에서 아버지 허엽과 두 번째 부인이었던 어머니 강릉 김씨 사이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엽은 당대에 존경받던 성리학자이자 종2품 관찰사까지 지낸 고관대작 출신으로, 강릉의 대표적인 음식을 '초당 순두부'를 만든 인물로도 유명한데 초당(草堂)은 바로 허엽의 호(號)였다. 허균은 부친 허엽이 무려 53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었다.
허엽과 그 자녀들은 부친의 재능을 이어받아 하나같이 총명하고 글솜씨가 뛰어났다. 허엽과 장남 허성(허균의 이복형), 동복 남매인 허봉, 허난설헌에 허균까지 다섯 사람을 가리켜 '허씨 5문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다.
허균은 자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밸이 커지고 간이 부어서 하루에도 수만 마디를 외우느라고 입술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사람들이 나더러 뛰어나게 똑똑하다가 칭찬했고 나 또한 그렇다고 과시했다"고 회상했다. 기록에서 보듯, 허균이 실제로 총명하기도 했지만 자신감과 과시욕도 넘치는 인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14세가 된 허균은 방랑시인 이달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처음에는 이달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 다소 무례하게 행동했던 허균은, 그가 즉석에서 한시를 막힘없이 지어내는 재주를 보고 크게 감복해 스승으로 삼는다.
사실 이달은 모계의 신분이 비천한 얼자(孼子)였고, 조선의 신분 제도상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유리천장에 막혀 꿈을 펼칠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허균은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조선 시대 서얼이 당하는 차별과 부당한 신분제도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달을 만난 이후 허균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자유분방하게 교류하기를 즐긴다. 허균의 작품과 사상을 관통하게 되는 사회비판적인 시선, 금기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 적인 반항아 기질이 형성된 계기로 꼽힌다.
1594년 26세의 허균은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오르게 된다. 당시는 임진왜란 시기였고 허균은 신입 문관임에도 탁월한 글솜씨를 인정받아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현안이던 명나라와의 외교 업무에 투입될 만큼 중용 받았다. 당시 국왕이던 선조 역시 허균의 능력을 아껴서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양국의 관리들이 한시를 주고받으면서 친분을 쌓고 소통하는 수창외교(酬唱外交)를 펼쳤다. 문장이 뛰어나고 음주·가무에도 능한 허균은 대명 외교에서 이러한 실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적격이었다. 1598년 명나라 문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를 엮어 편찬한 시문집인 <조선시선>의 서문에는 '조선에서 글짓기로 으뜸인 허균이 알려진 시로 엮어낸 책'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허균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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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
하지만 이후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허균은 평소 혼탁한 정쟁이 이어지던 중앙 정계에 염증을 느껴서 지방 관직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던 허균은 특유의 기질 때문에 가는 지방마다 부임 직후, 여러 번 물의를 일으켰다.
1599년 황해도 관찰사에 파견된 허균은 유흥을 위해 한양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간 사실이 적발되어 6개월 만에 파직당했다. 정작 허균은 자신을 향한 비난 여론에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 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를수는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응수했다. 공직자로서의 윤리의식은 부족하지만, 한편으로는 본성을 숨기는 가식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는 허균의 반항아적인 기질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1604년에는 황해도 군수로 파견됐으나 또 두 달 만에 쫓겨난다. 당시 지방의 세력가였던 이방헌이라는 인물이 죄를 짓고도 윗선에 뇌물을 주고 사건을 무마하려 하자, 허균이 이를 문제 삼으며 상관인 관찰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파직당한 것.
39살이 된 1608년에는 삼척 부사에 임명됐으나 이번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터부시되던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유학자들의 비난을 들으며 얼마 가지 못해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허균은 실제로 불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을 즐기며, 다방면에 박식하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순탄한 주류의 삶을 살 살았던 허균은 그렇게 스스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는 심경을 토로하며 거듭된 수난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관료 사회에서 허균처럼 여러 차례 파직을 거듭 당한 사례는 드물다. 더 특이한 점은, 허균은 아예 퇴출당하지는 않았고 다소 시간이 흐른 뒤에는 또다시 임용되면서 가늘고 길게 10여 년 넘게 관직 생활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허균이 정치적 핍박이나 괴짜 이미지와는 별개로, 정작 업무적인 면에서는 꽤 능력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1610년(광해군 2년) 12월, 허균은 전시 대독관(과거시험 감독관) 업무를 수행하다가 이번엔 친족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입시 비리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을 받게 된다. 허균은 이에 억울함을 호소했고 당시 시험에는 다른 고위 대신들의 가족들도 합격했으나, 광해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 묵살하고 허균에게만 죄를 물었다. 그만큼 허균은 당시 양반 사회에서 모난 돌 취급을 받으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이들이 비난하기 쉬운 표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유배지에서 허균은 <성소부부고>를 집필하면서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을 제시하며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치사상을 드러낸다. 허균은 "출신과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며 엄격한 신분제 유교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허균은 백성들을 '항민(굴종하는 백성)', '원민(원망만 하는 백성)', '호민(항거하는 백성)'의 세 부류로 나누었고, 이 중에서 가장 두려워할 존재로 호민을 꼽았다. 때를 기다렸다가 호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면 침묵하던 항민과 원민들과 합세해 같이 일어나게 되면서, '호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허균의 민본 사상이었다. 이는 현대적인 시민운동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허균의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은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홍길동전>은 억압적인 조선 사회에서 신분의 차별을 받던 얼자 출신 주인공이 기득권에 저항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허균에게 홍길동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현실의 부조리를 대신 타파해 줄 가상의 영웅이자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허균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였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광해군과 대북파는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허균은 역모의 주동자로 꼽힌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와 교류하면서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의혹을 받으며 이번엔 정말로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몰린다. 학계에서는 이 역모 사건 자체가 대북파의 정치공작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허균 역시 관계자인 서얼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누명을 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급해진 허균은 당시 대북파의 실세이자 권신이었던 이이첨에게 로비를 하여 구명을 요청했다. 다행히 허균은 옥사의 피바람을 무사히 피해 갈 수 있었고, 이이첨과 가까워지며 아예 대북파의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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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허균의 행적은 이전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이던 시절과는 전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철저히 광해군 정권에 충성하며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 심지어 허균은 광해군과 정적관계이던 인목대비의 '폐비 프로젝트'에도 적극 동참하며 자신을 따르던 유생들을 선동해 폐비 상소문을 쓰도록 선동하기도 했다.
허균은 과연 권력에 취하여 변심했던 것일까. 젊은 시절 허균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순탄하지 않은 관직 생활을 보내야 했고, 현실의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자신의 구상대로 조선을 경영해 볼 기회가 생겼다는 희망과 기대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허균은 광해군 정권에서 한때 정2품 좌참찬의 자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광해군은 1617년 허균이 기준격의 고발 상소로 위기에 몰렸을 때도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비호했다. 이후 허균은 자신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여서 왕실과 사돈까지 맺게되면서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허균에게 달콤한 권력의 맛은 오래가지 않았다. 1618년 8월 17일, 허균은 돌연 의금부에 하옥된다. 허균이 서얼과 승려들을 모아 역모를 모의했다는 충격적인 혐의였다. 이에 허균은 혐의를 단호하게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 허균의 유죄와 처형을 누구보다 강경하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이첨이었다. 한때는 허균을 구명해 주면서 돈독한 관계였던 이이첨은, 세자빈과 인목대비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며 불편한 사이로 돌아섰다. 당시 세자빈은 바로 이이첨의 외손녀였고,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온 것은 이이첨에게는 정치적 기반을 흔드는 큰 위협이었다.
이이첨은 대북파 신하들을 선동해 허균의 처형을 강하게 주장했고 광해군은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허균은 끝까지 역모 혐의를 부인했음에도 강제로 판결문에 서명해야만 했다. 심지어 허균의 사형을 집행한 이는 이이첨이었다.
정작 허균은 사형 집행 당일에야 비로소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 비로소 깨닫고 소리치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으나 국청의 상하가 모두 못들은 척 했고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허균은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간절한 마지막 외침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말은 그대로 허균의 유언이 됐다. 한때 조선 최고로 꼽히던 천재 문장가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리고 허균의 신원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았다.
허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허균이 정말로 역모를 꾸몄는지 의구심을 제기한다. 허균이 이이첨 혹은 광해군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다가 쓸모가 사라지면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토사구팽당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편으로 젊은 시절부터 파격적인 언행으로 주류 양반 사회에서 계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미운털이 박힌 영향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말년의 행보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한때 허균은 누구보다 세상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문제 인식을 지녔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결국 권력에 이용당하다가 제대로 포부를 펼쳐보지 못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현대에 이르러서야 낡은 질서와 고정관념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고 했던 허균의 행보와 사상은 뒤늦게 재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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