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죄다 시켜놓고 여자여서 안 된다? 장녀가 뭔 죄인가
[김성호 기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영화가 <시네마 천국>이다. 요새야 할리우드 편중현상이 과거보다 심해져 미국영화가 후보군 대부분을 차지하겠으나 십수 년 전만 해도 <시네마 천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영화 여럿이 목록을 장식했을 테다. 이를테면 이런 영화들, <인생은 아름다워> <지중해> <일 포스티노> <자전거 도둑> <피아니스트의 전설> 같은 작품들 말이다.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이탈리아 영화가 많다는 건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영화 잘 만드는 나라가 적지 않지만, 이탈리아 만큼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남는 작품을 많이 만든 나라는 흔치 않다.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특출한 때문일까. 그런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꼭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테다.
나는 그보단 이탈리아와 한국 사이의 공통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저 공통점이라기보단 진하게 닮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다.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며, 분단과 통합의 역사를 지녔고, 유럽에선 드물게 보수적이고 강한 가족주의적 전통을 가진 두 나라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한 파시스트가 격렬히 맞붙었고, 마침내 사회주의가 스러졌단 점도 비슷하다. 지독한 가난을 딛고 산업화에 성공했고, 오랜 독재를 겪었단 공통점도 있다.
변화하는 세상, 지켜내고픈 인간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한국인에게 또 다른 익숙함을 던지는 이탈리아 영화다. 영화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물론, 주제의식과 가벼운 설정들까지 한국인이 익히 느꼈고 공감했을 대목이 여럿이다. 쇠락하는 지방과 변모하는 농가의 이야기가 근간이 되겠으나 사이사이 한국에서도 우스갯소리처럼 통용되는 'K장녀'의 삶이라거나 미래가 보이지 않는 농가에서 여러 자식을 낳아 대가족을 꾸려가는 상황 따위가 그러하다. 말하자면 반 세기 전 이촌향도가 극심하던 한국 농촌의 감성을 이 영화로부터 읽어낼 수 있단 얘기다.
배경은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의 시골마을이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프라토, 아레초, 피사, 리보르노 등 9개의 현이 있는 이 지역은 기원전 에트루리아인이 문명을 이룩했던 지역을 로마가 정복해 지배했고, 훗날 자리한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상업의 번창과 문화적 창달을 이뤄내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중심지로 번성한다. 이토록 찬란한 역사를 지닌 토스카나는 오늘날에 이르러 직물산업과 농업, 관광 등의 산업이 발달한 이탈리아의 지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토스카나는 민족과 문명, 문화와 산업에서 수없는 변화를 겪어왔다. 변화는 새것이 일어나 옛 것을 대체했다는 뜻이다. 새것이 일어나는 동안 옛것은 스러진다. 이제는 오간 데 없는 에트루리아 문명이 그러하고, 또 로마의 그것들이 그러하며, 옛 르네상스의 주역들도 이제는 찾을 길 없다. 오늘날에는 쇠락한 농촌과 점차 축소되는 농업인의 설 자리가 또 그러하다.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선 비교적 부유한 곳으로 꼽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룽구 분)의 집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양봉업자 울프강(샘 루윅 분)이다. 벌통에 벌을 키워 꿀을 생산하는 일을 오랜 업으로 삼아왔다. 갈수록 줄어가는 수입에 양도 방목하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는 모양이다. 모은 꿀에 어떤 첨가제도 넣지 않고 전통 방식 그대로 생산하는데 수익은 보잘것없는 수준. 여유가 없어 낡은 채밀기가 든 생산실도 몇 년 째 손보지 못하고 그대로 써야 하는 상황이다.
토스카나 외딴 시골, 양봉농가 맏딸 젤소미나
줄줄 떨어지는 꿀을 매번 양동이를 바꿔가며 받지 않으면 흘러넘칠 지경이 되기 일쑤다. 때문에 울프강의 온 정신은 양동이를 가는 데 매여 있다. 딸 넷을 기르는 그가 홀로 이 일에 매여 있을 리 없다. 열두 살 난 맏딸 젤소미나가 이를 전담하다시피 한다.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토스카나에서도 양봉은 어려운 산업이다. 원인 모를 전염병과 기상이변으로 꿀벌이 갈수록 줄어가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가공식품과 기능성식품 등 수많은 대체품이 나오는 상황에서 천연 꿀을 찾는 수요 또한 늘지 않고 있다. 가격경쟁력도 마찬가지여서 양봉업에 매달리는 게 어리석다는 시선을 받기 일쑤다.
영화는 마을에 TV프로그램 '시골의 경이로움'이란 채널이 들어와 촬영을 하기로 한 시점을 다룬다. 큰 우승상금이 걸린 이 프로그램은 지역 농가 여럿을 소개하고 이중 참신하고 매력적인 농가를 우승자로 뽑는 경연으로 이뤄진다. 스타 방송인 밀리(모니카 벨루치 분)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며 여러 농가가 줄을 서는 가운데, 유독 고집 센 울프강만이 그 대열에 합류하길 거절한다.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서럽고 서운한 이탈리아 장녀의 삶
남기를 선택하는 울프강은 외톨이다. 살림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빚만 쌓여간다. 집과 땅조차 지킬 수 없게 되리란 불안은 그와 아내 모두를 괴롭힌다. 아내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울프강에겐 그것이 제 삶 전체를 포기하란 것처럼 들린다. 둘 사이는 좁혀지지 않고 대립각만 세워질 뿐이다. 울프강을 이해하는 이는 맏딸 젤소미나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젤소미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여자다. 농가의 일을 이어받을 자격은 사내들에게 있는 것일까. 적어도 울프강에게는 그러했던 듯하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젤소미나가 여자임을 알도록 한다. 급기야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가야 할 처지의 아이를 받아들여 일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신청한다.
겉으로야 정부로부터 대가를 받기 위함이라지만 그렇게 들인 막스가 순식간에 젤소미나의 일을 대체하는 모습이 그녀를 좌절하게 한다. 집안에 보탬이 되려 하고 제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는 장녀가 제가 사랑하는 이에게 영영 선택받지 못하리란 걸 깨닫는 순간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자라나는 세대로서 도시가 어떤 매력을 지녔는지를 막연하게나마 아는 아이, 그러나 동시에 제 아버지를 사랑하고 제 가족의 오늘을 지키려는 장녀인 젤소미나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그녀 덕분에 TV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일가족과 그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울프강의 모습이 애처롭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을 바라보는 거장의 시각
<더 원더스>는 토스카나,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한다. 에트루리아가 간신히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듯 전 시대의 가치와 산업과 가족과 정신들이 그렇게 소실됐음을 알도록 한다. 물질을 제일로 여기는 사고가 농촌을 장악하고 생산성 없는 농부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는다. 경쟁력 없는 산업이 밀려나는 걸 당연하다 여기는 오늘의 관점에선 자연스런 일이지만, 울프강과 젤소미나의 삶을 본 입장에선 부당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관심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 돈을 벌고 경쟁력으로 남을 것과 지워질 것을 정하는 태도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가 내보인다. 마침내 빈집이 되어버린 울프강 가족의 집을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들이 밀려난 마을이 과연 전보다 나아졌다 할 수 있을까. 울프강이 키우지 않는 벌들은 어디로 갔을까. 울프강이 없다면 꿀은 누가, 어떻게 모은단 말인가. 그런 자세와 마음으로 벌을 치고 꿀을 생산하는 양봉업자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수십 년 전 이탈리아 시골의 모습을 다룬 영화다. 이촌향도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 농가의 이야기를 덧댄 듯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딸이 이어받을 수 없는 아버지의 업과 고민, 그러나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인정을 받고 싶은 장녀, 무너지는 산업과 간신히 지탱하는 가장의 고민, 그밖에 온갖 것들이 대륙 저편 이탈리아와 이편의 한국을 닮아보이게 한다.
▲ 영화 <더 원더스> 포스터 |
ⓒ M&M 인터내셔널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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