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르포]마지막 공산주의자 ‘응우옌 푸쫑 서기장’의 서거

2024. 8. 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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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이후 최장수 서기장
경제발전 상징하는 큰 인물
국내 재계 인사들 대거 조문
부패척결로 국민들 존경받아
국부 호찌민 영향 마지막 세대

주한 베트남 대사관은 서울 경복궁 동쪽, 북촌의 끄트머리에 자리한다. 1992년 외교관계 부활 이후 자리는 뒤 한동안 한적하던 이곳은, 2000년대 이후 오가는 이들이 급증하자 2021년 최신식 건물로 탈바꿈하며 양국 관계 발전을 상징하는 장소로 거듭났다.

이곳에 7월 25~26일 국내 재계 인사들이 총집결하는 초대형 사건이 있었다. 삼성, LG, SK, 롯데, 효성 등 내로라하는 수백여 재계 VIP들이 삼청동 대사관에 집결한 것이다. 국내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든 대신 거물급 경제인이 대거 찾아온 것이 특징. 베트남 권력 서열 1위 응우옌 푸쫑 서기장의 국장(國葬) 때문이었다. 양일간 베트남 전역은 물론 전 세계 베트남 대사관엔 조문객들이 넘실댔다는 후문.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등 지역 및 이념과 무관하게 최근 급상승한 베트남의 위상을 반영하는 묵직한 이벤트로 치러졌다.

◆서거한 베트남 최고지도자

80세의 일기로 사망한 응우옌 푸쫑(1944-2024)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존재감을 인식한 한국인이나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2011년 이후 13년 가까이 최고지도자로 군림한 세계적 인물이었는데도 그렇다. 그를 포함한 베트남 인사는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끼칠만한 위상이 아니기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한국인이 관심을 갖는 베트남 인물은 1969년 서거한 호찌민 주석이 거의 유일한 형편. 그가 이미 사망한 지 반세기 넘은 역사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얼마나 베트남에 무지한지를 보여준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국립장례식장에서 베트남 1인자 응우옌 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장례식이 열렸다. 베트남군 병사들이 푸쫑 서기장의 관을 운구해 영구차로 나르고 있다. 하노이 EPA=연합뉴스

반대로 베트남에 투자한 한국 경제인에게 “응우옌 푸쫑”은 묵직하고 울림이 큰 이름이다. 베트남도 중국과 엇비슷하게 공산당 중심 사회인 탓도 있지만, 그만큼 베트남의 발전과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도 찾기 어렵기 때문. 즉, 발전하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큰 인물이기에 마땅히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가진 것이다.

양국의 경제적 친밀감은 언제나 역대 최고치를 갱신 중이다. 현재 한국과 베트남은 최대의 투자국이자 제2의 원조 제공국, 제3의 교역국으로 서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손꼽힌다. 베트남을 대체할 국제적 투자처를 당분간 찾기 힘들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2023년 기준 베트남에는 9000개 이상의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고, 총투자액은 859억 달러(약 114조)와 약 90만명에 달하는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는 베트남에 대한 여러 투자국 가운데 최고 수치다. 자연스레 한국의 베트남 의존 역시 크게 높아졌다. 과거엔 저렴한 노동력 활용이 주목적이었지만, 이제는 베트남 1억 내수 시장의 가치도 적지 않다. 또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도 20만을 헤아릴 정도다.

◆베트남 정치의 중요성

7월 19일 서거한 응우옌 푸 쫑의 국장과 안장식이 치러진 26일까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슬픔과 경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동안구 동호이 코뮌에 있는 응웬푸쫑 당 서기장의 고향에 2km가 넘는 길이의 추모 인파가 밀려든 것이다. 국장 기간 도시 곳곳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남녀노소 눈물을 흘리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서거를 기리기도 했다. 베트남 안팎 모든 관공서에서 조기로 게양하고 공공장소에서의 오락 활동이 완전히 중단됐다. 전국의 방송 채널은 최고지도자의 지난 행적을 알리고 그의 사상을 알리는 방송을 이어갔다. 이 정도의 추모 열기는 호찌민-레주언 등의 1세대 국보급 인사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든 열풍이었다.

“도이머이(개혁개방) 이후 최장수 서기장이자 진정한 애국자, 그리고 영원한 공산주의자”

이는 응우옌 푸쫑을 주로 수식하는 말이다. 공산당 서기장(총비서)은 대통령과 총리 국회의장에 앞선 국가 서열 1위 자리다. 베트남 통일 이후 이들 핵심 4개 자리는 주로 나눠먹기식 인선이 이어지며 특정 인물이 정치를 주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11년 국회의장을 거친 응우옌 푸쫑이 등장하면서 양상이 변한 것이다. 2018년에는 국가주석을 겸직했으며 2021년엔 전례 없는 서기장 3연임을 기록하며 사실상 “전권(全權)”을 행사하게 된다. 그의 사망에 베트남 국민들이 크게 슬퍼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높은 직위에 오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베트남의 급격한 경제발전과 팬데믹 와중에 “부패와의 전쟁”을 밀어붙이는 뚝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경제성장 와중에 국가의 토지와 산업시설을 활용해 급속하게 부유해진 공산당내 각종 파벌 간 은밀한 협상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철저하게 공산당의 창당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한 맑스-레닌주의자였다. 이미 자본주의가 만연한 베트남 체제에서 그의 정치적 태도는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평생을 공산당의 이론가이자 선전·선동을 담당한 언론인으로 일한 그는, 본인 스스로 철두철미한 청렴 실천과 가족들까지도 고위직을 탐하지 않는 절제를 선보임으로써, 베트남 정치엘리트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지막 선비

최근 전 세계 최초로 그에 대한 평전이 한국서 출간됐다. 조철현 작가가 펴낸 “베트남 총비서 응우옌푸쫑”이 바로 그 책이다. 조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오늘날 베트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의 인생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면서 “마지막 선비라고 칭할 수 있는 응우옌 푸쫑의 윤리관과 국가관이 상당 기간 베트남 차세대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베트남은 여전히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국가다. 공산당 권력이 기업을 감시하고 정책으로 산업의 미래를 뒤바꿀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급속한 개혁개방의 와중에 탐욕에 눈이 먼 공무원들로 인해 베트남의 기업과 외국계 기업이 작지 않은 불편과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베트남 경제가 흔들림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응우옌 푸쫑과 같은 큰 어른이 국가의 중심을 잡고 부패한 공무원을 솎아내고, 사회의 약자를 위한 정책을 적절하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응우옌 푸쫑이 서거하면서 이제 국부(國父) 호찌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세대가 사라졌다는 평가다. 과연 그에 필적하는 차세대 지도자가 등장할지, 또 그들은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을지 관심거리가 되었다.

정호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정호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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