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갑자기 흑인됐다" vs 해리스 "똑같이 오래된 쇼"(종합)
"그녀가 인도인인지, 흑인인지 모르겠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엔 흑인 청중들 앞에서 '경쟁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인종 정체성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해리스 부통령이 인종적 특징을 정치적 이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주장이다.
공화당 내 의원들조차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종주의 발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흑인 여학생 모임에 참석한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의 발언은 분열과 무례라는 똑같은 오래된 쇼"라며 "미국인들은 더 나은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일축했다.
"해리스, 흑인이냐" 인종주의 발언 논란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전미흑인언론인협회(NABJ) 초청 토론에서 해리스 부통령에 대해 "그녀는 항상 인도계였고, 인도계 유산만을 홍보했다. 나는 몇 년 전 갑자기 그녀가 흑인으로 변신하기 전까지 그녀가 흑인인 줄 몰랐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또한 "나는 양쪽 모두 존중하지만, 그녀는 명백히 아니다"면서 "그녀는 항상 인도계였고, 갑자기 흑인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 대로 해리스 부통령의 아버지는 자메이카 출신, 어머니는 인도 출신이다.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난 그는 워싱턴DC의 흑인 명문대학인 하워드대를 졸업했고, 흑인 여성 커뮤니티인 알파 카파 알파의 회원이었다. 2019년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캘리포니아대 헤이스팅스 법과대학 재학 시 흑인 법학생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CNN방송은 "트럼프의 주장은 거짓"이라며 "해리스는 '갑자기' 흑인으로 정체성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정치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남아시아계 혈통도 존중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NABJ 행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있어 흑인들의 표심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로 평가됐지만, 인종주의 발언이 부각되면서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평가들이 잇따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출마 포기 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집토끼'인 흑인, 라틴계 표심 이탈이 확인되자,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날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흑인을 위한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자평하며 "이 나라의 흑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종주의 발언에 노골적인 야유와 한숨이 확인됐다. 또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행사 초반 ABC뉴스 레이철 스콧 기자가 압박 질문에 나서자 "이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질문받은 적이 없다"면서 "당신은 ABC 소속이냐. 가짜뉴스, 끔찍한 가짜뉴스 방송"이라고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스콧 기자의 질문은 과거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과 흑인 검사를 '짐승'으로 묘사한 것 등이었다. 당초 1시간 예정이었던 이날 토론은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불과 34분에 갑자기 트럼프 캠프 측 요청으로 끝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행사 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루스소셜에서도 "카멀라 해리스는 그녀가 흑인이 아닌 인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완전히 가짜"라며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을 되풀이했다. 해당 게시글은 해리스 부통령이 인도계 미국인 영화배우 민디 캘링과 함께 남인도 지역의 음식인 마살라 도사를 만드는 2019년 영상과 함께 올라왔다. 직후 펜실베이니아 유세에서 청중들에게 공개된 스크린 이미지에는 해리스 부통령이 '최초의 인도계 미국인 상원의원이 됐다'고 보도한 과거 기사 제목이 담겼다.
"트럼프 주장 거짓" 비판 잇따라...공화당 의원들도 당황
현지 언론들은 이번 논란을 두고 과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의혹으로 편견을 조장했던 '버서리즘(Birtherism)'과 비교하며 "거짓 주장"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해리스에 도전했지만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니다"면서 "여성 혐오적, 인종차별적 발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유색인종 여성 경쟁자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분열된 국가의 통합을 촉구했던 트럼프가 정적에 대한 개인적 공격, 언론인에 대한 적대를 이어갈 것이라는 시그널"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명백한 인종주의 폄하발언"이라면서도 "행사 후 트럼프는 자신이 만든 논란에 정치적 가치를 확인한 듯하다. 인종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 극우 세력과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역사상 첫 여성 흑인 백악관 대변인인 커린 잔피에르는 "그가 방금 한 말은 혐오스럽고 모욕적"이라며 "아무도 누군가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식별되는지 말할 권리는 없다"고 비판했다. 해리스 캠프의 마이클 타일러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역시 "트럼프가 정확히 누구인지 보여줬다"면서 "혼란과 분열의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종주의 발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톰 틸리스 상원의원은 공화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종주의 발언을 피해야 한다면서 "경제실패, 국경실패, 국가안보 등에 집중해서 승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 바라소 상원의원 역시 "해리스의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케빈 크레이머 상원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을 '풍자'로 일축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인 J.D 밴스 부통령 후보는 엑스(옛 트위터·X) 계정에서 "트럼프는 NABJ 콘퍼런스에서 어려운 질문에 답할 용기가 있음을 보여줬지만, 해리스는 겁쟁이답게 모든 조사나 비우호적 언론을 계속 피하고 있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앞서 NABJ측은 해리스 부통령에도 참석을 요청했으나 일정상 불가능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흑인 여학생들 앞에 선 해리스, 트럼프 발언에 "똑같은 오래된 쇼"
공교롭게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토론이 진행된 이후 해리스 부통령이 참석한 유세장은 흑인 여학생 친목단체인 '시그마 감마 로 소사이어티'의 제 60회 국제 비엔날레 무대였다. 흑인 여학생들 앞에 선 해리스 부통령은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점을 상기했다"면서 "오늘 오후 트럼프가 NABJ에서 연설했는데, 이는 똑같이 오래된 쇼, 분열과 무례함이었다"고 일축했다. 이어 "미국인들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과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을 향해서도 거짓 주장과 인종주의 발언을 일삼은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리더, 사실을 직면했을 때 적대감과 분노로 반응하지 않는 리더, 우리의 차이점이 우리를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대선은 97일 후이며, 여러분에게 많은 것이 걸려있다"면서 "우리가 조직하면 산이 움직이고, 우리가 조직하면 국가가 바뀌고, 우리가 투표하면 역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투표를 촉구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예약한 해리스 부통령을 향한 지지 선언도 확대되고 있다. ‘민주당 큰손’인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공동창업자를 포함한 100명 이상의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VC) 투자자들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발표했다. 이들은 "우리는 친기업, 친아메리칸 드림, 친기업가 정신, 친기술 진보를 추구한다. 민주주의가 미국의 근간이라고 믿는다"면서 "이 중요한 순간에 해리스를 지지하기 위해 하나가 됐다"고 강조했다.
공개된 서명자 명단에는 호프먼 외에도 미국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 구단주였던 가상화폐 투자자 마크 큐번, 오픈AI 등에 투자한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 창업자, 유명 엔젤 투자자인 론 코웨이, 억만장자 크리스 사카 등의 이름이 포함됐다. 앞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기업인과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를 선언한 데 따른 맞불인 셈이다.
미국 최대 자동차산업 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도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숀 페인 UAW 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 우리의 목적은 트럼프를 물리치고 해리스를 선출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노조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억만장자를 재집권시킬 수도, 기업 탐욕에 맞선 전쟁에서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해리스를 뽑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해리스 부통령은 다음주 UAW 회원들과 만나 미시간에서 함께 집회에도 나설 예정이다.
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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