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정치적 양극화의 극복은 언론부터
연출한 것 같은 장면이었다. 미국 대선후보 트럼프는 총탄이 귀를 스친 순간에도 일어서 군중들을 향해 주먹을 드높이 들고 ‘싸우자!’를 외쳐대었다. 놀라운 이야기꾼은 이 장면이 ‘그림이 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얼굴에 피가 흐르는 채로 검은 제복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트럼프가 휘날리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불끈 주먹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전 세계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조회 수를 올리는데 최적화된 플랫폼에서 한 번 시선을 끈 콘텐트는 알고리즘 추천과 공유를 타고 들불처럼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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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은 정치와 시민의 파이프라인
이슈의 지나친 단순화, 성찰 방해
유력 정치인 언행 중계 보도 과다
정책 현안의 심층 취재·분석 필요
」
그림이 된다는 것은 전달하는 메시지가 직관적이고 단순 명확하다는 것을 말한다. 실체와 상관없이 그럴싸해 보여야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단순하다. 주인공이 적을 만나 위기상황 끝에 승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이야기에 탐닉하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팩트도 이야기가 입혀지면 한층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협력을 통해 지구를 지배하게 된 인간은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갖추었고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무수한 간접경험을 쌓는다. 세상사를 이야기로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생존의 기술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애초에 뒤섞여 있는 실재와 허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취약점을 가진다. 그럴 듯한 것을 사실로 여기기 쉬운 것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이 때로는 합작하여 시민들이 국가적 당면과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숙고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게 이름 붙이기를 통해서 이야기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검찰의 제3의 장소 출장 조사를 “황후조사”라고 간단히 정리하면 왕조와 같은 권위, 구태, 특혜라는 의미가 딱 와 닿는다. 청문회를 “인민재판”이라 부르면 광기 어린 집단공격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빨갱이나 친일파로 간단히 규정지어 버리는 것과 같이 이름 붙이기는 강력한 프레임이자 현대판 프로파간다이다. 신박한 용어를 붙이는 기자나 국회의원(혹은 보좌관)은 그들끼리는 서로 능력자 취급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과도한 단순화는 극단적 관점을 강화하는 정치적 양극화의 불쏘시개다. 가뿐하게 사건을 정의하고 평가해버림으로써 그 본질을 더 깊이 살피고 성찰하는 일을 멈추게 한다.
이야기의 힘 앞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취약하기에 저마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오늘날 사회현실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애초에 본능에 맞서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사회적인 장치도,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언론의 역할은 한 사회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핵심적이다. 일상이 온통 플랫폼을 통해 매개되는 현대사회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외국어 하나 습득하듯이 오롯이 개인이 배우고 연습해서 길러야 하는 어떤 역량이 아니다.
주변에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지인이 부쩍 늘었다. 뉴스를 보고 있자면 기분만 나빠지고 피로감이 쌓인다는 것이다. 새로이 구성된 국회는 개원식도 하지 못한 채 민생은커녕 정쟁의 수위만이 높아져 가고 있다. 입으로는 통합을 외치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이미 정서적 양극화로 진화하여 생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으로 미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치를 바꾸기 어렵다면 대안은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해서 정치적 양극화의 악순환을 조금이라도 제어하는 것이다. 언론은 정치와 시민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다. 언론이 정치를 쫓아 취재하지만, 역으로 정치인은 언론이 어디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정책 현안에 관한 정치인의 행보와 법안에 관해서만 주목을 하고 데이터를 쌓고 들춘다면 정치인들이 이를 외면하기 어렵다.
만약 지금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 우리 정치 뉴스를 보면서 인간들의 정치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배운다면 정치는 누가 어떤 계파인지, 누가 누구에게 줄을 섰다든지 누구를 배신했다든지 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을까 싶다. 정치 뉴스를 회피하는 것은 이것이 일반 시민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연예 기사가 몇몇 아이돌을 다루듯 정치기사는 소수의 유력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심층보도를 한다. 그야말로 TMI이고 시간 낭비다. 정치인의 소셜미디어 발언을 생중계하듯 쏟아내고 독자들이 알아서 읽으라고 책임을 미룬다면 언론이 맹비난하는 유튜버 사이버 레커와 다를 바 없다. 누가 민생을 외쳤다, 우클릭했다, 좌클릭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 그들을 적극적으로 취재하여 민생이라는 추상적 단어 안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시민을 대신해 캐물어야 한다.
끝없이 심각해지는 정치적 양극화의 고리를 어디서든지 끊어야 한다. 정치적 양극화의 심각성을 외치는 언론의 자기 개혁부터 시작하면 어떤가.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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