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40세 ‘불혹’ 김정은, 11세 어린 딸을 후계자로 파격 내정?
북한이 ‘사회주의의 시조(始祖)’로 여기는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8일 사망해 올해가 30주기다. 사망 3년 전인 1991년 9월 북·중 접경 지역인 자강도 고위 간부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김 주석은 “구라파(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하루아침에 다 망했지만 우리나라만은 끄떡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끝까지 고수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난 시기 당을 강화했고, 김정일 동지가 당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쌓고 대를 이어 혁명과 건설을 현명하게 영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탈냉전기였던 1980년대 후반 옛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전환을 했지만, 북한은 후계자 문제를 마무리한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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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후계자 덕에 안 망해”
김일성·김정일 60세에 후계 지명
국정원 “김주애 후계 수업 중”
후계자 요건 아직은 못 갖춘 듯
」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권력의 3대 세습에 성공했다. 이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29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 위원장의 딸 김주애(11)에 대한 후계자 수업을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김주애가 후계자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게 국정원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국정원의 이런 판단 배경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한다. 김주애가 2022년 11월 북한 매체에 등장한 이후 공개된 활동의 70%가량이 군사 분야에 집중됐고, 그가 제국주의와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또 북한이 수령이나 후계자에게 사용하는 ‘향도’라는 표현을 김주애에게 쓴 것도 후계와 관련 있다고 국정원은 분석했다.
경쟁시켜 결정해 온 북한의 후계
북한은 건국 초기 국내 공산주의 세력 외에 소련파·연안파·빨치산파 등이 얽혀 있는 연합정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며 박헌영 남로당 당수로 대표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허가이·박창옥 등 소련파가 대거 축출됐다. 이후에도 10여 년에 걸쳐 쿠데타 모의가 발각돼 연안파가 몰락하는 ‘8월 종파 사건’(1956년) 등 각종 정치 투쟁에서 빨치산파가 승리하며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했다. 1960년대 중반에 김일성을 신으로 여기는 ‘신정(神政)체제’가 시작됐다.
이후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실질적인 선거는 없었다.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지 못했고, 후계자가 되는 것만이 수령에 오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김일성이 권력 투쟁에서 정권을 확보했다면, 김정일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계모 김성애의 비호를 받은 이복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던 삼촌 김영주도 경쟁 대상이었지만, 김정일은 31세에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
김정일의 눈에 김정은 역시 이복형인 김정남, 친형인 김정철과 비교 대상이었다. 2008년 여름 뇌졸중이 발병한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고, 북한은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를 계기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처음 공개했다. 후계자 선택은 수령의 의중이 결정적이다. 북한은 수령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결정을 반대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령과 역할·지위 같은 후계자
북한은 육체적 생명은 부모에게서 받지만, 정치적 생명은 수령(당)에 있다는 ‘사회 정치적 생명체론’을 주장해왔다. 여기에서 수령을 인체의 뇌(북한은 ‘뇌수’라 표현)에 비유하며 ‘인민 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이라거나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북한이 수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최고 존엄이라 부르는 이유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이후 체계화한 후계자론에 따르면 후계자는 수령의 지위와 역할이 같다. 후계자에겐 이데올로기를 해석하는 권한도 있다. 후계자는 ‘미래의 수령’을 예약한 인물이지만, 사실상 현실의 통치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생전에 “1974년부터 1994년 김일성 사망 이전까지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공동으로 정권을 이끌었으며, 1985년부터는 사실상 김정일이 북한을 통치해 왔다”고 증언했다. 김정은 역시 2010년 후계자로 공표된 뒤부터 각종 지시를 하고 통치해온 사실이 속속 알려졌다.
후계자론이 내세우는 후계자의 최우선 덕목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다. 비범한 예지와 뛰어난 영도력, 고매한 공산주의 덕성도 지녀야 한다. ‘계속혁명’을 위한 혈통 계승론, 수령이 살아 있을 때 후계자를 지명하는 준비론, 다음 세대에서 후계자를 지명한다는 세대교체론은 후계론의 핵심이다. 수령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실한 인물은 자식이고, 다음 세대에서 후계자를 지명한다는 논리는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정당성 확보 차원일 수 있다.
봉건적 성격이 강한 북한에서 수령의 자식들은 태어나서 생활하는 그 자체가 제왕학(帝王學)이다. 이를 고려하면 김주애도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고, 후계자 수업 중이라는 국정원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북한 매체들도 김주애에 대한 수식어를 2022년 첫 등장 이후 ‘사랑하는’에서 ‘존귀하신’을 거쳐 지난 3월엔 ‘향도의 위대한 분들’로 격을 줄곧 높여왔다.
김정은의 계산된 혼선 전술일 수도
그러나 북한이 제시한 후계자 요건을 고려하면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김주애가 수령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비범한 예지와 뛰어난 영도력 및 공산주의 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요건에 충족하는지는 의문이다. 또 김일성·김정일이 60세를 넘겨 후계자를 지명한 것과 달리 올해 불혹(不惑), 즉 만 40세인 김정은이 이 문제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궁금증을 낳는다.
무엇보다 김주애가 다른 형제들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김정은의 자녀에 대해 김주애가 첫째이고 막내가 아들이란 설이 있다). 그렇다면 최근 북한의 김주애 부각 작업은 김정은의 관심 끌기 차원 또는 계산된 혼선 전술일 수도 있다. 예단하고 휩쓸리기보다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국정원은 김주애가 후계 수업 중이라면서도 다른 형제가 후계자로 나설 가능성을 언급하며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김정은의 후계자가 되는지에 따라 남북관계나 북핵 문제, 동북아 지형이 출렁일 수 있다. 한국에 특히 민감한 영향을 줄 사안이다. 현 시점에서 보기에 4대 세습 가능성이 크지만, 북한의 후계 문제는 관객처럼 아니면 말고 식으로 바라볼 사안은 아닐 것이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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