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인맥 아닌 공정…그 뻔한 성공 방정식
"뽑힌 걸 어떡해요. "(전훈영)
한 종목 올림픽 10회 연속 금메달의 위업을 달성한 한국 여자 양궁대표팀 전훈영(30)은 팀 막내 남수현(19)보다 11살 많은 대표팀 맏언니지만, 둘 다 이번이 생애 첫 올림픽이었다. 2024 파리 올림픽을 3개월 앞둔 지난 4월, 그러니까 지난해 9월부터 이어진 3차에 걸친 혹독한 선발전과 두 차례 평가전을 더 거쳐 이 둘이 최종 3인에 포함됐을 때 적잖은 우려가 나온 이유다. 올림픽 직전 월드컵 결승에서 중국에 패하자 걱정하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학연·지연은커녕 과거 올림픽 몇 관왕이라는 무시무시한 경력이나 대중적 인지도에 대한 정무적 고려조차 없이 오직 성적으로만 선발하는 한국 양궁의 '공정성'이 국제무대 호성적의 비결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그럼에도 1위로 합류한 임시현(21)까지 전부 올림픽 경험이 전무하다는 데 불안해했다. 하지만 전훈영의 말처럼 뽑힌 이상 그 무엇도 엔트리를 흔들 수 없었고, 남녀 동반 단체 금메달로 그렇게 또 공정의 힘을 증명했다.
■
「 실력 우선 양궁, 인맥 축구와 대조
선발 바꿔 신진 파격 발탁한 사격
퇴행 거듭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
찬사는 당연히 선수들 몫이지만, 지원은 아낌없이 하되 간섭은 일절 않는 대한양궁협회(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리더십 얘기도 안 할 수 없다. 선수뿐 아니라 감독까지 '인맥' 선발을 반복하며 퇴행하다 이번 파리올림픽에 출전 못 한 축구협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리우·도쿄에 이어 이번 파리까지 3연속 금메달을 딴 남자 양궁대표팀 맏형 김우진(32)은 2012 런던올림픽 당시 최고 에이스였지만 탈락했다. 남자팀 허리 이우석(27) 역시 리우 땐 4위로 아깝게 선발되지 못했고, 2020 도쿄올림픽 땐 뽑혔지만 코로나로 대회가 1년 연기되는 바람에 결국 또 탈락했다. 만약 그럴 때마다 양궁협회가 나서 "사정이 안타깝다, 본선 경쟁력이 있다"며 한 명쯤, 아니, 이번 한 번만, 이라며 누군가에게 양보를 강권하며 원칙을 깨자고 들었다면 들이댈 명분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대회 임박까지 격렬하게 이어지는 '투명한 선발전'을 고수했고, 그 덕분에 아무 잡음 없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모두가 수긍하는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다시 축구 얘기로 돌아와, 2002 한일 월드컵 영웅인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축구협회가 선수를 제안한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이른바 '인맥'과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축협에 맞서 "우리만의 명단이 있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고선 월드컵이 임박할 때까지 인맥 좋고 서열 상위인 스타 플레이어까지 포함한 최종 선발 테스트를 이어갔다. 당연하다고 여겨진 '인맥' 명단 대신 진짜 실력만 본 공개 오디션을 한 셈이다. 그 결과 주전·비주전 없이 모든 선수가 끝까지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실전에서 최고 기량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공정이 문화로 잡으면, 선수들은 열심히 노력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에 덧붙여 우리만의 우물 안 개구리 식 편협한 잣대가 아니라 외부 변화를 빠르게 읽고 대처하는 능력도 꼭 언급하고 싶다. 한국 양궁팀 독주를 막기 위해 지난 36년 동안 올림픽에선 규칙이 여섯 차례나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장 발 빠르게 대처했다. 훈련을 실전처럼 할 수 있도록 파리 현지 경기장과 똑같은 환경을 조성하는 걸 넘어, 원래 불량 화살 골라내려 도입한 로봇을 진화시켜 만든 무적의 슈팅 로봇과 대적하는 식의 첨단 훈련 기법 도입도 큰 역할을 했다. 이번에 남자팀 막내 김제덕(20)이 접전을 거듭하던 중국과의 준결승전 당시 손에 벌이 앉은 상황에 아랑곳없이 10점을 쏜 데서 알 수 있듯,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돕는 훈련까지 했다.
대회 초반부터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있는 사격도 비슷하다. 사격협회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실리콘밸리 IT 기업가가 된 빅데이터 전문가인 이은철 국제사격연맹 국제심판을 경기력향상위원장으로 모셔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는 대표 선발부터 바꿨다. 이미 리우 때부터 결선은 낮은 점수부터 탈락시키는 녹아웃 방식이 도입됐는데, 한국은 여전히 경력자가 유리한 고득점순 선발을 고집했다. 하지만 결선 녹아웃으로 바꿨더니 경험은 부족해도 실전에 강한 젊은 선수들이 파격적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공정을 토대로 최신 정보와 기술을 활용해, 선수들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경쟁하게 한 게 확실한 성공 방정식이었던 셈이다. 비단 축구뿐 아니라 퇴행만 거듭하는 정치권, 아니 우리 사회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연 15% 주는데 안사면 바보? '최신상 월배당' 실체 | 중앙일보
- "잘생긴 남자 한국에 다 있나"…오상욱, 전 세계 여심도 찔렀다 | 중앙일보
- ‘성매매’에 망한 강남 그 건물…‘텅빈 방’이 1000억 올려줬다 | 중앙일보
- '금메달 포상금' 1위 홍콩은 10억 쏜다…9위 한국은 얼마 주나 | 중앙일보
- 30 대 6, 야구 맞아?…두산, KIA 상대로 역대 최다 득점 신기록 | 중앙일보
- "동탄서 서운하지 않았나" 충주맨 돌직구에 경찰청장 답변은 | 중앙일보
-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지다" CNN도 홀린 K저격수 김예지 | 중앙일보
- "샤워하고 나오면 훤히 다 보인다"…여자 육상선수 분통, 무슨 일 | 중앙일보
- "50대 한국인 아빠, 4살 친딸 성폭행" 외국인 아내 뒤늦은 신고, 왜 | 중앙일보
- "밥맛 없다" 머리 잡은 황선우…수영 황금세대 주저앉고 울었다 [파리TALK]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