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

2024. 8. 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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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일본의 막부 말기에 막부와 존왕(尊王)파의 갈등이 움틀 무렵인 1842년. 당시 야마구치(山口)의 하기(萩)성에 타마키 분노신이라는 인물이 작은 서당을 열었다. 다다미 여덟 폭으로 만든 쇼카손주쿠(松下村塾) 학당이었다. 학생은 70명 남짓이었다.

그곳에는 타마키의 조카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도 있었다. 삼촌이 일찍 죽자 1857년 요시다 쇼인이 이 학당을 인수했다. 학생으로는 뒷날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꼽히는 키도 타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다카스기 신사쿠, 그리고 막내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있었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그 밑바닥에 정한(征韓)의 야심을 깔고 있었다. 그는 매튜 페리 제독의 함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한 뒤 척양(斥洋)의 길을 갔다.

요시다 쇼인

그는 막부의 핵심 인물인 마나베 아키카츠 암살을 모의하다가 반역죄로 몰려 29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학당의 맏형들이 죽음을 피해 숨어들 무렵 막내 이토 히로부미는 18세의 몸으로 목이 잘린 스승의 시체를 껴안고 “선생님의 유지를 제가 잇겠다”고 맹세했다.

스승이 죽은 뒤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으로 넘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왔다. 조선 침략의 야망을 키우며 스승의 뜻을 이루려 했는데, 그 정신이 곧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였다.

쇼카손주쿠는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지금도 도쿄의 택시는 ‘쇼곤주쿠(松魂塾)’를 새기고 달리고 있다.

조선의 망국이든 일본의 침략이든 결국에는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20세기 초 상황에서 한국에는 지모와 전략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적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은 주제이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모르고서는 극일(克日)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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