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과 일본군에 포위·체포 당해

김삼웅 2024. 7. 3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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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25] 일제는 면암을 '거괴'라 호칭했다

[김삼웅 기자]

 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 눈빛출판사
 
일제는 조선 백성들의 신망이 높은 면암의 의병이 호남 지방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하고 머잖아 광주를 점거하게 될 지 크게 두려워하였다. 곳곳에서 의병 지원자가 줄을 서고 점차 정예화하는데 대응 조치가 시급해졌다. 통감부의 총무장관 쓰루하리가 본국의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에게 보낸 동향보고서이다. 일제는 면암을 '거괴'라 호칭했다. 

이달 4일 밤에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 1백여 명이 전라북도 태인군에서 일어났으며 동시에 전주·목포 사이의 전선을 절단하여 상황이 불온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에 앞서 홍주(홍성)의 비도는 거의 전멸되었으나 그 거괴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한 때는 다시 재연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지만 전혀 예상을 벗어났다.

그 거괴는 작년 한일신협약의 성립에 즈음하여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우리 헌병으로부터 서울을 벗어나라는 명령을 받은 전 찬정 최익현이라는 자로서, 임병찬이라는 자를 부장으로 삼아 태인에서 정읍군을 거쳐 순창군을 점령하고, 혹은 담양에 이르고 혹은 곡성에 진입하여 머지않아 광주로 남하하려는 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전라남도 각 군의 인심이 흉흉해졌으며 도처에서 부설(浮說)과 유언비어에 현혹되는 경우가 있어서 각 지역에 소재한 본국인(일본인)도 또한 그들의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목포 이사관으로부터는 수비대의 파견을 요청에 오기에 이르렀다. 또 한편에서는 광주 진위대의 거동에 혹시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하는 점이 있어, 치안유지상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여 주차군(한국주둔 일본군)과 협의한 결과, 목포·군산 지방을 수비할 목적으로 보명 1개 중대를 광주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주석 1)
 최익현 피체지라는 설명문이 길가에 덩그러니 서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 김상기
 
통감부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고종을 움직여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고, 조선군 진위대를 동원하여 의병의 활동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폈다. 이른바 '이이전략'이었다. 의병을 이끌고 장성으로 출발할 때 척후병의 보고에 왜군 수백 명이 산 숲속에 잠복해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왜군이 아닌 조선의 진위대 병력이었다. 면암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동족상잔이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전투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진위대 측에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살상을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대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렇게 한다면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면암집>)

면암의 통절한 호소에도 전주·남원의 진위대는 일본군과 함께 1일 오후 6시경 군사를 움직여 의병을 포위하였다. 중과부적이었다. 면암은 의병들에게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들은 모두 떠나 후일을 도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의병이 22명이었다. 

이튿날 면암을 비롯한 의병 13인은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황성신문>의 보도이다. 

전북관찰사 한진창씨가 작일 정부에 전보하되 전주진위대가 12일에 순창군에 이르러 하오 5시에 최익현·임병찬 등 13인은 생금(생포)하고 여중(나머지)은 개산(해산) 하였는데 병정과 인민을 병무일상 이으니 (이상 없으니) 생금 제인을 어떻게 조처할지 즉시 회교하라 하였는데 답전하되 최·임 등 제인은 엄수하고 사핵(조사) 상보하라 하였더라. (주석 2)

면암은 구인이 되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였다.

이날 밤 최익현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한 일본인이 통역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최익현은 일어나 앉아 정색하며,

"너는 누구냐?"
하고 호통을 치자, 통역은
"광주 고문관 쓰나시마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최익현은 소리를 높여
"왜놈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
하고 물었다.
"어르신네께서 임의로 각 읍 창곡(倉穀)을 끌어낸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너는 대한국 최참판이 의병의 맹주인 것을 몰랐느냐? 내가 내 나라 곡식을 방출하는데 너 왜놈이 무슨 상관이냐?"

최익현은 이렇게 꾸짖었다.
23일(양력 6월 11일) 전주의 진위대 소대장 김회진이 찾아와,

"황상의 칙지에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대감께서는 길을 떠나셔야 하겠습니다."하고 최익현을 부축하여 창·칼과 협낭을 끄르려 하였다. 최익현은 "네 놈이 바로 이토오·하세가와의 심부름꾼이냐? 오직 놈의 심부름꾼이냐? 역적 놈들이 강제로 받아 낸 것을 감히 황상의 칙지라고 빙자한단 말이냐?"하고 꾸짖었다. (주석 3)

주석
1> 박민영, 앞의 책, 176~177쪽.
2> <황성신문>, 1906년 6월 14일.
3> 김의한, 앞의 책, 6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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