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식 소총, '빵야'의 눈으로 본 살육의 역사…그는 "부엌의 가마솥"이었네

"나는 우리 집 대문이었어. 나는 마당의 펌프였어. 나는 부엌의 가마솥이었어. 아버지 삽이었어. 어머니 호미였어. 우리 교회 촛대였어. 우리 신당 쇳대였어. 간이역 기찻길이었어. 시골길 자전거였어."

연극 '빵야' 공연 사진. 드라마 작가 나나(왼쪽에서 첫 번째)는 장총 '빵야'(왼쪽에서 두 번째)와 우연히 만나게 되고 '빵야'의 일대기를 소재로 드라마를 쓰게 된다.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백두산 압록강변의 졸참나무였던 '빵야'. 악기가 되고 싶었던 나무는 1945년 2월 인천의 군수공장에서 장총으로 태어난다. 빵야의 몸통을 만든 것은 필부필부의 집 대문, 마당 펌프, 부엌 가마솥에서 떼낸 쇠붙이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전국에 금속 회수령을 내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쇠붙이를 끌어모았다. 빵야의 몸통이 된 가마솥이 한숨을 쉰다. "나 없으면 밥은 어디에 짓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제 징집된 청년들의 처지도 가마솥과 다르지 않았을 터다.

연극 '빵야'의 주인공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점령한 조선 땅에서 태어난 99식 소총, 빵야다. 빵야는 조선 독립군 토벌을 시작으로,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 수많은 살육을 마주한 뒤 한 포수의 손에 넘겨지고, 마지막에는 전쟁 영화 제작용 소품이 돼 창고에 처박힌다. 조선인 출신 일본 관동군 장교, 중국 팔로군, 국방경비대, 서북청년단, 빨치산 소녀, 지리산 심마니, 건설업자, 영화 제작자… 수많은 손이 빵야를 거쳐 간다.

군수 공장의 노동자들이 '빵야'의 몸통에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장을 새겨 넣고 있다.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빵야를 손에 쥔 이들이 무수한 비극을 목도했다. 제주도의 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순진한 무근은 배가 고파 군대에 입대해 빵야를 마주한다. 신출은 인민군 손에 비참하게 살해된 아버지를 떠올리며 빵야를 집어 든다. 한때 꽃담 너머로 정을 나눴던 아미와 원교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전쟁이 뿌린 비극의 씨앗은 오래도록 반도 곳곳에 스며들었다.

잊힌 드라마 작가 '나나'는 빵야와 함께 스토리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나나는 빵야의 역사를 옴니버스 형식의 극본에 담아내려 하지만 뚜렷한 영웅도, 빌런도 없이 흘러가는 연작 소설 같은 이야기를 받아줄 제작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가 쓴 극본은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함께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나나가 팔리는 극본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빵야의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던 평범한 이들의 삶이 극 중 극으로 펼쳐진다.

독립군 토벌, 제주 4·3, 한국전쟁 등 비극의 현장이 이어지며 쉴 새 없이 스토리가 몰아친다. 질곡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담은 작품이지만 유쾌한 장면을 곳곳에 배치해 완급 조절을 했다. 수시로 시간과 공간이 변하고 한 배우가 여러 배역을 오가지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소극장 연극이지만 출연 배우가 9명으로 적지 않고 전쟁 장면 등에서 9명의 배우가 모두 나와 무대를 꽉 채운다. 일인 다역을 소화하는 조연 배우들의 열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빵야'를 연기 중인 배우 박성훈. 사진 엠비제트컴퍼니

주인공 빵야 역에 '더 글로리'(넷플릭스), '눈물의 여왕'(tvN)으로 연기력을 입증한 배우 박성훈이 발탁됐다. 박정원·전성우·홍승안도 빵야를 연기한다. 나나 역에는 이진희·김국희가 캐스팅됐다. 오대석, 견민성, 김세환, 금보미, 진초록 등이 멀티플레이어로 다역을 맡았다. 극본은 2016년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극작가 김은성의 작품이다.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이듬해 초연을 올렸고, 지난해 제61회 K-씨어터 어워즈 대상,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23 공연 베스트 7’에 오르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예스24 티켓 평점은 5점 만점에 4점. "비극적 근현대사를 거쳐 자본주의 영화의 소품이 된 빵야의 운명에 모든 것이 담겼다", "영상 콘텐트가 넘치는 시대에 연극을 봐야 할 이유를 알려주는 작품"이라는 평이 눈에 띈다. 공연은 9월 8일까지 종로구 아트원씨어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