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1인자, 이란 대통령 취임식날 테헤란서 피살…중동 정세 격랑
중동에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가 한층 짙어졌다. 이스라엘과 휴전 협상 중인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최고 정치 지도자가 이란의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 테헤란에서 암살됐다.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에선 헤즈볼라의 최고위 지휘관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몇 시간 만에 중동의 시아파 맹주 이란이 지원하는 두 무장정파의 주요 인사가 연달아 숨졌다.
이에 따라 일부 진척을 보였던 가자 전쟁 휴전 논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충돌이 본격화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지난 4월 이스라엘과 제한적인 본토 공습을 주고받은 후 정면 대결을 자제했던 이란의 향후 대응에 따라 중동 전역으로 전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이어졌다.
새벽 2시 이란 국외에서 발사된 미사일 공격 받아
하마스는 31일(현지시간) 정치국 최고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됐다고 발표했다. 이란혁명수비대(IRGC)도 성명을 내고 하니야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그의 숙소를 표적으로 한 이스라엘의 급습을 받아 경호원 한 명과 함께 살해됐다고 밝혔다.
이란 국영 매체들에 따르면 하니야는 테헤란 북부에 있는 재향군인 거주지에 머물고 있다가 이날 오전 2시 이란 국외에서 발사된 ‘공중 유도 발사체’의 공격을 받았다. 이란 당국은 발사체가 발사된 위치를 조사중이다. 하마스와 이란의 발표대로 이스라엘의 소행이 맞다면 이스라엘 측의 이란 본토 직접 공격은 지난 4월 19일 이후 103일 만이다.
앞서 이스라엘은 27일 있었던 골란고원 축구장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30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남부를 공습해 헤즈볼라 최고위 지휘관인 푸아드 슈크르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슈크르는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의 ‘오른팔’로 불리는 인물로, 가자 전쟁 발발 다음 날인 지난해 10월 8일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헤즈볼라 공격을 지휘해 왔다. 다만 헤즈볼라는 슈크르의 생사 여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하마스 지도자, 헤즈볼라 최고위 지휘관의 잇따른 죽음은 이란이 대통령 취임식을 계기로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과 연대를 과시하는 날에 발생했다. 하니예는 가자전쟁 휴전 협상 과정에서 하마스를 대표해 협상장에 나섰던 인물로,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30일 이란을 방문했다. 대통령 취임식엔 하니예 뿐 아니라 헤즈볼라 2인자 셰이크 나임 카셈,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라믹 지하드(PIJ) 지도자 지야드 알-나카라, 예멘 후티 반군 대변인 무함마드 압둘살람 등 이른바 ‘저항의 축’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이들은 취임식에 앞서 페제시키안 대통령,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면담했다. 특히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하니예는 포옹 후 함께 손을 들어 올리며 승리를 다짐했다.
하마스, 보복 가능성 시사…이스라엘은 논평 거부
하마스 측은 즉시 보복을 다짐했다. 하마스가 운영하는 알아크사TV에 따르면, 하마스 고위관계자 무사 아부 마르주크는 하니야 암살은 “처벌받지 않을 수 없는 비겁한 행위”라며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최고국가안보회의(SNSC) 긴급회의를 소집해 관저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하마스 암살에 대응하는 이란의 전략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혁명수비대 고위급 인사는 “이란에서 하마스 지도자를 겨냥한 것은 이란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군은 하니야 사망과 관련해 논평을 거부했다. 이를 두고 AP통신은 “이스라엘은 모사드 정보 기관의 암살 작전에 대해선 공식 입장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오랫동안 자국 개입 사실을 숨긴 채 상대방의 요인·시설을 공격하는 ‘그림자 전쟁’을 벌여 왔다. 특히 이란은 이스라엘이 자국 내에서 암살 작전을 수행했다고 믿고 있다.
2021년 이란의 핵 과학자 모흐센 파크리자데이가 원격 조종 무기로 살해된 사건, 2022년 5월 테헤란에서 이란 혁명 수비대 사령관 사야드 코다이 대령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대표적이다. NYT는 “하니야가 죽기 불과 몇 시간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등 이란 지도부를 긴밀히 접촉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안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스라엘이 휴전협상 중 공격을 단행한 이유와 관련, “만약 협상에 방점을 둔다면 지금 이런 식으로, 이란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있는 지도자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네타냐후 연정이 계속 전쟁 분위기를 유지해야 되는 상황으로 판단한 것 같다. 전쟁 분위기가 유지돼야 정치적 생명이 계속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각국의 친이란 무장세력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란 분석도 나왔다. 미국 싱크탱크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 매슈 레빗 선임 펠로는 CNN에 “이스라엘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며 “테러 단체들의 지도자들은 설사 자신들을 보호하는 나라에 있어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동 무장정파 요인들의 잇따른 죽음에 이 지역 정세는 요동칠 전망이다. 하마스 측 분석가인 이브라힘 마훈은 NYT에 “이스마일 하니야의 살해는 하마스에게 타격이지만 하마스는 과거 하마스 지도자들인 아흐메드 야신과 압델 아지즈 란티시의 죽음을 겪은 바 있다”며 “하마스 정치 지도자의 살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에 한계선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연구위원은 “하마스는 차기 후계자를 세울 테지만 이미 궤멸 상태라 이스라엘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반격하면 이란도 (전쟁에) 끌려갈 수 있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헤즈볼라 등 통해 이란 반격 커질 수도”
가장 큰 변수는 이란의 대응 방식이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이란은 개혁파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굉장히 어려운 카드를 안게 됐다"며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지난 4월 이스라엘 본토 공습보다는) 높은 강도의 보복이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이 교수는 다만 “지금 전면전을 해서 이란이 승산이 별로 없고, 그런 상황은 미국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CNN은 “지금 이란에겐 좋은 선택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테헤란에서의 발생한 암살 사건은 이란에겐 주권 침해이자 안보 문제다. ‘손님’이었던 하니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지역 강국의 역할을 잃게 되기 때문에 이란 입장에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헤즈볼라를 내세워서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도 쉽지 않다. 이란 입장에서 헤즈볼라는 강력하지만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인 셈이라, 이란도 시기 등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두 무장정파 요인의 사망으로 전면전 위험이 한층 커졌다고 지적했다. 미국 조지타운대 중동학 교수인 나데르 하셰미는 BBC에 하니야의 죽음을 두고 “이 지역(중동)은 그 어느 때보다 전면전에 가까워졌다”고 전했다. 이번 사건 전까지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공격에도 역내 긴장을 더 이상 고조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이제 이런 예상이 뒤집었다는 것이다. 하셰미 교수는 “이제 이란은 이 갈등을 확대할 모든 명분을 쥐게 됐다”고 전했다.
한편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하니예 피살에 대한 질문에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다. 외교를 위한 공간과 기회는 항상 있다”며 “이스라엘이 공격당한다면 이스라엘 방어를 계속 돕겠지만, 우선순위는 긴장을 낮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일현·박형수·박현준 기자 baek.il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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