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흘러 다시 연 책, 깜짝 놀랐다

김성호 2024. 7. 3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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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37]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김성호 기자]

감탄했다. 책 깨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이제껏 읽은 책 가운데 이토록 큰 폭의 개정이 이뤄진 경우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오류를 비롯해 너무한 수준의 발췌 등 비판을 받는 대목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보다 더한 저술 가운데서도 판만 거듭해 찍는 경우가 얼마나 흔했던가. 새로 쓴다고 해도 좋을 개정작업에 얼마나 큰 노고가 들었을지 알만도 했다.

유시민의 저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이야기다.

1988년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을 나는 중학생 시절 처음 접했다. 역사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내게 '거꾸로 읽는'이라는 제목이 매력적으로 와 닿았고, 진보적 지식인으로 인기가 높았던 저자에 대한 호감도 작용했던 탓이다. 책 좀 읽는 친구들 사이에서 필독도서처럼 폭넓게 읽히기도 했던 이 책은, 그러나 내게는 꽤나 실망스런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이유다. 내가 책을 읽은 21세기 초에 이 책은 더는 새롭지가 않았다. '거꾸로 읽는'이란 표현이 기대하게 하는 파격이며 신선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저작이었단 뜻이다. 1988년으로부터 2000년까지 세상이 바뀌어도 아주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저자의 시각이 깃든 구성과 해석이 역사학계 내에서 대부분 정론으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것이어서 무엇을 거꾸로 읽는단 것인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책 표지
ⓒ 돌베개
 
20년 흘러 다시 본 책, 놀라운 변신

또한 이미 유명한 세계적 저술, 이를테면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대목도 여럿이어서 실망스런 인상이 컸다. 나 같은 중학생이 그러했다면 역사학도나 학자들에겐 더욱 큰 충격이었을 테다. 다른 책을 발췌하고 인용했다는 언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출처가 명시되지 않은 이런 책이 한국에서 널리 팔려나가는 대중서란 게 아쉽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이 책이 절판됐을 때도, 지난 2021년 또 다시 나왔을 때도 별 기대를 갖지 않은 터였다. 절판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생각했고, 재판은 여느 베스트셀러가 그러하듯 표지갈이 수준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전주의 한 서점을 지나다 매대에 누운 이 책을 슬쩍 들춰보았는데 그야말로 깜짝 놀라 각 잡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책은 앞에 저술한 단점, 즉 독자적 시각이 부재하고 발췌한 대목을 공개하지 않았던 과오를 완전히 바로잡고 있었다. 새삼 감탄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드레퓌스 사건'을 첫머리에 배치한 것이 식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다른 사건들이 하나같이 세계사적 의의가 큰 일대 사건이었다면, 드레퓌스 사건은 지극히 프랑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간첩조작은 지난 시대에나 있었던 사건일 뿐이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또한 홀로코스트와 얽혀 이제는 식상해진 사건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한국과도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인 건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2013년, 한국 한복판에서 드레퓌스 사건과 다를 바 없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말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북한 화교 출신인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가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며 기소한 사건으로, 언론보도를 통해 국정원과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가 조작된 것으로 판명돼 충격을 던졌다.

민주화가 이뤄지고도 한참이 지난 21세기에도 정부가 무고한 시민에게 간첩누명을 씌우는 일이 벌어졌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유씨 외에도 간첩조작이 의심되는 사건이 수 건 터져 나왔고, 시민들은 비로소 민주정권 안에서 공공연히 공안사건을 조작하는 사례가 있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사건 간첩으로 몰린 유우성씨와 압박으로 오빠가 간첩이란 거짓 증언에 이른 동생 유가려씨의 모습.
ⓒ 뉴스타파
 
역사는 진보하는가, 반복되는가

1894년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권력의 오작동과 맞물려 어떻게 정의를 훼손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흐른 한국에서 이번엔 북한에서 살았던 화교 출신 중국 국적 공무원이 간첩으로 조작되는 일이 발생했다. 과거 프랑스 군부가 진실을 알고도 덮었듯, 또 적극적으로 진실을 은폐해나갔듯이, 한국의 국가기관들이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이를 감옥에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책은 드레퓌스 사건으로부터 1차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사라예보 사건, 러시아 혁명, 대공황, 대장정, 히틀러, 팔레스타인,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 맬컴 엑스, 핵무기 개발,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등을 차례로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이었고 인종학살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가해자가 되어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이야기, 또 그를 해소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노력이 언급되기도 한다.

어느 시선에서 보면 역사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으나 다시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이 있고, 홀로코스트 뒤 가자지구에서의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역사는 좁은 보폭으로라도 진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믿음을 품게도 된다. 책은 호찌민과 무하마드 알리, 오펜하이머, 고르바초프와 같은 이를 등장시켜 이들이 다른 이와 달리 내린 선택을, 또 그 선택이 이룬 변화를 서술한다. 그로부터 독자는 그들이 없었다면 있었을 역사의 진행방향 한편으로, 그들이 있어 이뤄진 커다란 변화의 지점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좀처럼 엮이지 않을 것 같던 커다란 사건들이 서로 긴밀하게 엮여 움직이는 과정은 인류역사가 어느 하나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단 인식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오늘의 사건이 내일을 이루는 바탕이 되어 오늘을 함부로 보내지 못하도록 이끈다는 뜻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엿보이는 유태인에 대한 혐오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유태인이 시온주의 아래 결집하는 배경이 되고, 이는 다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중동의 불안으로, 또 첨단무기의 발달과 주력 에너지의 변화로 연결되니 역사가 고립된 개별 사건이 아닌 변화하는 흐름으로 존재함을 이해하게 된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푸른나무가 출간한 구 개정판 표지
ⓒ 푸른나무
 
허점을 바로잡고 새로 쓰는 자세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보자면 작가 유시민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개정하지 않고 판매하거나 절판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대부분을 수정해 새로 쓴 작업이 의미 깊게 다가온다. 쉬운 길을 가는 대신 고되고 또 저의 지난 미숙함을 상기하게 하는 작업을 감행함으로써 저술이 미칠 영향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꿔내는 데 집중한 선택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개별 사안의 사실관계 정리는 물론 역사적 해석까지가 큰 폭으로 보강됐고, 문장과 구성 또한 보다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한두 권의 책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발췌하는 대신 폭넓게 사실관계를 조사한 흔적 또한 역력하다. 고단했겠으나 독자는 전과 비할 수 없는 완성도의 세계사 입문서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제 잘못을 기꺼이 바로잡은 저술을 말이다.

불행히도 세계 정치사는 2021년보다 발전했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겠다. 2021년 작가 유시민은 트럼프와 같이 혐오를 결집의 수단으로 쓰는 대통령이 재선하리라 믿지 않았고, 대량살상무기가 다시 이 땅에서 활용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돌아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또 향후 발발할 수 있는 전쟁의 씨앗들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세상이다. 이 가운데 환경과 생태는 제대로 돌아봐지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인류는 언젠가 오늘을 돌아보며 힘겨웠지만 그래도 해냈다고 뿌듯해하게 될까. <거꾸로 읽는 세계사> 가운데 깔린 낙관주의에 좀처럼 동조할 수 없는 건, 내가 그만큼 지혜롭지 못해서일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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