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된 그 부부

오길영 2024. 7. 3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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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의 뾰족한 시각] 소설 <붉은방> 과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되는가?

[오길영 기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 TCO㈜더콘텐츠온
 
누구에게나 첫 번째 경험은 기억에 남는다. 오래전 내가 처음 발표한 평론은 양귀자 작가와 임철우 작가를 다뤘다. 그때 읽었던 임철우의 <붉은 방>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을 칼럼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다.

화제가 되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Zone of Interest>(아래 <존>)를 보고 나서 문득 임철우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철우 작품이나 <존>을 두고 국가폭력, 나치즘, 인종주의, 학살, (반)유대주의 등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건 이들 작품에 드러난 캐릭터들이 보이는 무사유, 정확히 말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사유의 문제다.

어떤 평에서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면서 <붉은 방>이나 <존>에 드러난 무사유, 혹은 악의 평범함을 부각한다.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붉은 방>에서 공안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인 최달식이나 <존>의 핵심인물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잔드라 휠러)는 평범한 악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로 치밀하게 합리화하고 생각한다. 사유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사유의 바탕을 보려고 하지 않고, 튼실하지 않은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할 뿐이다. 합리성에도 급이 있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괴물의 탄생'은 어떤 맥락에서 가능한가?    

무관심과 외면이 만드는 '괴물'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는 점은 이성과 믿음의 관계다. 제대로 된 믿음은 이성의 축적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지금 득세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따져봐서 옳으므로 믿는 태도가 아니다. 그 반대다. 합리적 근거가 있든 없든 '내'가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먼저다. 그걸 정당화하려고 사후적으로 이성과 논리가 동원된다.

최달식은 공안 형사로서 소임에 충실하다. 자신이 국가를 어지럽히는 악을 처단한다고 굳게 믿는다. 악의 근원인 빨갱이를 제거하는 것은 공적으로는 국가를 위한 것이고 사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든 적에 대한 복수다. 그가 겪은 모든 불행은 6·25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주변 사람, 어렵게 살아남은 아버지가 어린 최달식 앞에서 빨갱이라고 지목된 이들을 총살한 일, 전쟁 후에 술주정뱅이가 되어 철도사고로 최후를 맞은 아버지, 그 충격으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등 모든 원인은 저들에게 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믿는 게 관건이다. 적으로 지명된 자들은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나 물건이 된다. 영화 <존>에서도 확인하는 점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적으로 분류되는 순간 어떤 인간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존재, 감정을 투사할 필요가 없는 사물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장면이 가능해진다. 어이없는 이유로 고문의 대상이 된 교사 오기섭은 공권력으로 포장된 고문 가해자들에게는 오늘 처리해야 할 일거리일 뿐이다.  
   
"보나 마나 뻔하지 머, 외상값 독촉이겠지. 어제가 월급날인데, 외상 같은 것 없어. 그건 자네한테나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아이구, 그나저나 쥐꼬리만한 월급에 이것저것 떼고 나니깐 마누라 얼굴 보기가 민망하더라구. 어이. 그쪽 좀 잘 잡아, 물이 튀기잖아. 참. 이 친구는 제법 잘 참는데, 독종이라 그렇지. 쓰발. 암만 생각해도 때려치우고 장사나 할까. 이번이 보너스 타는 달이데, ...... 점점 사지의 힘이 빠져나간다. 이젠 버둥거릴 힘도 없다." 
 
 제1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겉표지
ⓒ 문학사상사
 
오기섭을 고문하면서 이들은 아이가 걸린 감기와 독감을 걱정한다. 그들에게는 감기 걸린 자식과 그들이 믿는 국가 이념을 같이하는 이들은 인간이지만, 오기섭같이 빨갱이 혐의가 있는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202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2024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과 음향상 수상작인 <존>을 보면서 나는 변형된 형태로 등장하는 최달식들을 본다. 제목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관심 지역'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Zone of Interest'는 찾아보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싼 일정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제목은 다른 것도 뜻한다. 특히 'interest'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해관계, 혹은 관심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뒤집어 보면 무관심과 외면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외면해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무)관심(interest)과 이익(interest)은 밀접히 연결된다. 어떤 것에 무관심해야 이익을 얻는다.

영화는 학살이 이뤄지는 수용소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벌어지는 루돌프 회스 부부와 그 가족의 일상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학살 장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멀리서 보이는 굴뚝 연기와 수감자들을 싣고 오는 기차가 뿜는 연기, 그리고 영화 내내 들리는 거슬리는 소리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바로 옆에서는 수많은 인간이 죽어가는데, 그 옆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생활을 한다. 그런 생활이 가능해지려면 철저한 무관심과 외면이 요구된다.   

담장 너머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신에게 각인하는 데서 생기는 강박적 회피, 회스 집안의 사람들이 창문을 가리려고 반복해서 커튼을 치면서 흔들리는 시선에서 드러나는 불안감은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야 하는 무관심의 산물이다.

회스 부부는 자신들이 교양있는 인간이고, 담장 너머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 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관객이 보는 회스 부부는 괴물이다. 영화는 건조하게 헤트비히와 친구들이 학살된 이들이 남기고 간 물품을 두고 잡담을 나누고, 집안일을 돕기 위해 징발된 유대인들에게 언제라도 제거할 수 있다고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루돌프 회스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유대인을 제거할 수 있는 순환소각장 설계 방식을 두고 전문가와 논의한다. 그 순간 이들은 냉철하고 무자비한 감정은 없는 기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억압하려고 해도 실패하는 순간이 온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루돌프는 자신이 한 일을 상관에게서 인정받은 후에 사령부 건물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여러 번 구토한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무의식적 자각이 작동한다. 사위를 찾아온 루돌프의 장모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소각장의 연기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집을 떠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지금의 희생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될 수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 TCO㈜더콘텐츠온
 
임철우 소설은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존>은 다르다. 영화는 한밤중에 유대인이 강제노역하는 현장에 몰래 들어가 그들을 위해 사과를 숨겨 놓는 폴란드 소녀의 모습을 두 번에 걸쳐서 흑백 열화상 화면으로 보여준다. 실존 인물에 기반했다는 소녀의 형상은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되고,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키는가를 표현한다. 어두운 화면에 반짝이는 소녀와 사과의 이미지는 그걸 상징한다.

내가 <존>을 또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로 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회스 부부 같은 괴물의 자리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치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도 제대로 사유하지 않으면 다른 시대, 다른 맥락에서는 가해자, 괴물이 된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이 했다는 말을 적는다.

"이스라엘의 10월 7일 희생자(2023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날-편집자)나 현재진행 중인 가자지구 공격의 희생자 모두 이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인데,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요?"(<씨네21> 기사) 

원래부터 그랬던 가해자나 희생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든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빈약한 근거에 기대 누군가를 적으로 간주하고, 그 적을 아무 감정 없이 제거할 수 있는 사물로 환원하고, 이 모든 과정을 성찰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지금의 희생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그 지점을 타격한다. 우리는 "인간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려면 "그걸 의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길이 힘들고 드물지라도. 

"자넨 설마 저 바깥 길거리를 두 발로 서서 돌아다니는 모든 존재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들이 두 발로 똑바로 서고 애를 임신하면 태내에 아홉 달을 품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물고기나 양, 벌레나 거머리인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미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꿀벌인지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 모두에겐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어. 다만 스스로 그걸 눈치채고, 스스로 어느 정도는 그걸 의식하는 법을 배워야만 이 가능성이 진짜 그의 것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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