從吾所好… 유려하고 기품 있게 격변의 시대 살다

손영옥 2024. 7. 31. 13: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비 김가진 ‘백운서경’ 서예전
구한말∼일제강점기 서예가이자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백운서경’전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행초서체로 쓴 논어 구절 ‘종오소호(從吾所好)’는 유려창달한 동농체의 맛을 잘 보여준다. 동농문화재단 제공


탐험가이자 화가,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는 1890년 조선을 방문한 뒤 견문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썼다. 풍물과 제도에 대해 소개하는 이 책에서 그는 이례적으로 고위 관료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을 만난 일화를 적고 있다.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중략)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랜도어가 반한 조선의 선비 김가진을 서예사 측면에서 조명하는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최근 개막했다. 동농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포함한 추진위원회가 기획했다.

서예가 김가진의 흔적이 궁금하다면 창덕궁을 찾으면 된다. 1903년 비원(후원) 감독에 임명된 그는 후원 연못의 ‘관람정(觀覽亭)’ 현판을 포함한 편액 15건, 주련(다섯 자 내지 일곱 자 시구를 나무판에 새겨서 기둥에 붙인 것) 74건을 썼다. 또 안동 봉정사 등 사찰과 서원 등지에 쓴 현판 글씨가 전국 각지에 있다.

창덕궁 후원 연못의 ‘관람정(觀覽亭)’ 현판. 동농문화재단 제공


서예가로서 동농체(東農體)는 약간 흘려서 쓰는 행서와 행초서에 기반 한다. 19세기 들어 청나라 금석문에서 영향을 받은 추사 김정희의 예서풍 파격미, 혹은 몽인 정학교 등 감각적인 분위기를 지닌 초서체와 거리를 둔다.

청년 시절 청의 양무운동을 보고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40세인 1886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참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 특명주차일본전권대신 등 외교의 실무를 맡았다. 또 1896년에는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황해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법무대신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지자 칩거에 들어갔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역시 분연히 일어나 그해 10월 73세 노구를 이끌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돼 독립운동에 힘쓰던 김가진은 1922년 77세로 타계했다.

전시에는 김가진이 상하이에서 대동단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쓴 편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개국 2주년을 기념하여 쓴 시 등이 나왔다. 아들 김의한을 위해 직접 만든 한글 교재 등 다정했던 아비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 행서와 행초서로 쓴 자작시는 문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안중식 김규진 김석준 오세창 등 당대 서화가들과의 교유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글씨도 많이 나왔다. 김가진이 서울 인왕산 자락 백운동에 집을 지을 때 서화계 어른 오세창은 겸재 정선의 그림 ‘백운동도’를 선물했고, 김가진은 이에 화답해 쓴 감사편지가 그런 예이다.

‘종오소호(從吾所好·내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

기러기 날갯짓같이 유려한 행초서로 쓴 이 글귀는 파란만장했지만 거칠 것 없이 격변의 구한말∼일제강점기를 통과해온 독립지사이자 서화가 김가진의 삶을 요약한다.

김양동 서예가는 “종오소호 현액은 동농체가 가장 잘 드러나는 글씨”라면서 “동농체는 자하 신위의 계보를 잇는 행초서 위주로 껄끄러운 삽기(澁氣) 보다는 유려창달(流麗暢達)한 맛이 있는 지사적인 서풍”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스마트폰 일상화, 한자 교육의 부재 등이 겹쳐 점점 멀어지는 서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지 주목된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이 2020년 선보였던 최초의 서예 단독 기획전 ‘미술관에서 書(서): 한국 근현대서예전’은 대만에 수출이 돼 이달 6일 타오위엔시립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등 거장의 대표작을 포함 서예 전각, 회화, 조각 등을 90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 기간인 10월 21일까지 2만명 정도의 관람객을 예상했는데 이달 25일 현재 1만6000명이 다녀가는 등 반응이 뜨겁다. 전시 기획자 배원정 학예사는 “K-아트에 대한 관심이 겹친 측면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대만에 서법(서예) 인구가 있어 이런 수치가 가능하지 않겠냐”며 “서예는 한자를 몰라도 글씨 자체의 조형성이 주는 감동이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서예 전시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