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자주 말할 걸" 네 살 아들에게 못 전한 아내의 죽음
6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작은 배터리에서 난 연기가 42초 만에 공장을 가득 메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23명의 소중한 삶이 사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숫자 '23명'이 아닌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전한다. <편집자말>
[박수림, 소중한 기자]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 애써 눈물을 참고 있다. |
ⓒ 소중한 |
김일(42)씨는 가족사진 속 아들을 가리키며 "엄마를 똑 닮았죠"라고 되뇌었다.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아내 이해옥(39)씨를 잃은 그는, 유산의 아픔까지 겪으며 어렵게 얻은 아들에게 차마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중국동포인 부부는 한국에서 만나 결혼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들은 현재 엄마의 부재를 모른 채 중국에 있는 할머니와 지낸다.
김씨는 기자에게 연신 "제가 아들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아들이 '엄마에게 왜 연락이 없는지', '엄마가 왜 목숨을 잃었는지', '그 공장은 왜 그렇게 위험했는지' 물었을 때 "해줄 말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해줄 말을 찾기 위해 "알고 싶다"고 했다.
6월 24일 숨진 이씨의 시신은 아직 냉동고에 있다. 김씨는 하루빨리 답을 찾아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싶다. 7월 29일 유가족 쉼터에서 만난 김씨의 손에 당일 받아온 우울증 약 처방전이 들려 있었다.
이루지 못한 '부부의 꿈'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가 생전 남편 김일씨, 아들과 찍은 사진. |
ⓒ 유족 제공 |
인터뷰 날로부터 딱 18년 전인 2006년 7월 29일, 중국 길림성의 스물넷 청년 김씨는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다. 곧장 방수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옥상과 화장실 방수 공사 일을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회사로 이직해 일하던 중 헤이룽장성(흑룡강성) 출신의 아내 이씨를 한국에서 처음 만났다.
"저희 고모의 딸(고종사촌)이랑 아내의 이모가 동창이라 두 분께 소개받았어요. 2016년 6월 4일, 안산역 1번 출구 앞에서 처음 만났지요. 연애 전 아내네 집에 놀러 갔는데 닭도리탕을 해주더라고요. 두 번째 갔을 때는 만두도 해줬어요. 2년 정도 연애하다 2018년 결혼식을 올렸어요.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지요."
김씨는 휴대전화 속 아내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다. 두 사람은 안산에 터를 잡고 살았다. 밖을 거닐 땐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연애 때부터 8년간 말다툼 한 번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 2019년 말엔 선물처럼 아들이 찾아왔다. 유산 후 어렵게 얻은 자식인지라 최선을 다해 키우고 싶었다.
"제가 퇴근하고 오면 셋이 모여서 저녁밥을 함께 먹었어요. 저는 안산 건설 현장에서 일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저녁 7시에 돌아왔거든요. 집사람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또 손맛이 정말 좋았지요. 이전에 식당 아르바이트나, 파출부 일을 하면서 요리를 배웠대요. 미나리 김치, 겉절이, 깍두기 같은 음식을 잘했어요. 아들은 아내가 해준 돼지고기 장조림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저희 둘 다 F-4(재외동포) 비자인데, 돈 많이 벌어서 영주권을 따면 우리 아들에게도 자동으로 영주권이 나온대요. 그럼 나중에 아들이 학교에 갈 때 편안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안산 현장에서 일해봐야 돈이 얼마 안 되더군요. 애는 매일 크고 앞으로 태권도도 배워야 하고, 음악 학원도 다녀야 할 거고, 영어도 배우려 할 거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방 건설 현장으로 출장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 소중한 |
김씨 역시 자신과 아들이 집에 없는 사이 아내에게 우울증이 올지 몰라 걱정했기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나가서 바람도 쐬고,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했다. 일을 시작한 곳이 아리셀 공장인데, 그곳이 그렇게 위험했는지 꿈에도 몰랐다.
"집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건 (숨지기) 한 달 전이에요. 아침 일찍 강릉으로 출장 가느라 같이 밥도 못 먹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집사람은 5월 13일부터 일했더군요. 집사람한테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안 물어봤어요. 남편이 자꾸만 '돈 돈 돈 돈' 거리면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어쨌든 아들은 7월 13일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아내는 7월 12일에 일을 그만두려고 했죠(6월 24일 참사 발생). 비행장(공항)에 가서 아들 데려오겠다고... 그만두려고했는데..."
애써 슬픔을 참던 김씨의 눈 주변이 빨개졌다. 결국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김씨는 "강릉 출장 때 보니 정동진이라는 곳이 좋길래 아들이 돌아오면 가족끼리 동해로 놀러 가려 했다"면서 울었다. 세 식구의 여행 계획은 그렇게 사그라졌다.
남편의 걱정 "나중에 아들이..."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 눈물을 닦고 있다. |
ⓒ 소중한 |
참사 당일 김씨는 강릉 건설 현장에 있었다. 아내의 소식을 들은 건 다음 날이었다. 지하에서 일하느라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았다. 공구를 찾으러 잠깐 밖에 나갔을 때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무수히 와 있었다.
"친척들이 '왜 전화를 안 받냐. 해옥이가 어째 잘못된 것 같다'고 했어요.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해옥이가 아리셀 화재 현장에서 돌아간 것 같다'고 했죠. 그날 강릉에서 화성으로 가려는데 기차표도 다 매진이었어요. 화성에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도착했고, 화성서부경찰서에 가서 '이해옥 남편입니다'라고 했더니 '집사람이 돌아가신 게 맞다'고 그러더군요. 그때까지도 믿지 않았어요. '많이 다쳤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왜 평상시에 흔하디흔한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 해줬는지... 그게 제일 후회돼요."
아내를 떠나보낸 뒤, 김씨는 잠을 잘 자지 못 한다. 맥주만 먹던 그는 밤마다 소주를 마신다. 담배 세 갑을 비워야 잡생각 속의 하루가 겨우 지나간다.
"가끔씩 멍하니 하늘을 쳐다봐요. 비 오는 날에는 집사람이 울고 있는 것 같고, 맑은 날에는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마음에 병이 온 것 같아요."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우울증 약 처방전을 내보이고 있다. |
ⓒ 소중한 |
인터뷰 날 아침에도 김씨는 보건소에 다녀왔다. 그의 손에 들린 소견서와 처방전엔 '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상세 불명의 반응'을 뜻하는 질병분류기호 'F43.9'가 쓰여 있었다. 몸과 마음이 이런데도 김씨의 걱정은 자신보다 아들을 향하고 있다.
"언젠가 아들이 저한테 물어볼 거 아니에요. '엄마는 왜 전화 한번, 문자 한번 없어?' 그러면 제가 뭐라 할까요? 언젠가 아들이 크면 '너희 엄마 돌아가셨다'고 말할 날이 오겠지요. 그러면 아들은 이렇게 물어볼 거예요. '엄마가 왜 돌아가셨어?' 기자님, 제가 뭐라 해야 할까요? '네가 중국에 갔을 때 엄마가 집에 생활비라도 보태려고 아리셀 공장에 일 갔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고 말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아들은 또 물어볼 거예요. '그렇게 위험한 공장에서 무엇 때문에 일을 했어?'라고. 그럼 제가 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답이 없어요. 난 (아내가 왜 죽었는지) 딱 이것만 알고 싶어요.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장례 미룬 이유 "온전히 보내주고 싶어서"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며 참사를 상징하는 파란 리본을 만지고 있다. |
ⓒ 소중한 |
김씨는 아내의 시신을 봤다. 그래서 위 물음에 답을 내놓지 않는 아리셀과 정부가 더욱 원망스럽다. 합동분향소에 '윤석열 대통령' 이름이 붙은 근조화환이 왔을 때만 해도 그는 답을 들을 줄 알았건만, 여지껏 그는 아내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리셀 그게 회사입니까. 아내 시신을 봤어요. 무릎 아래가 없고 두 손목이 없어요. 저는 진짜 궁금해요. 아내의 신체 일부가 공장 한 구석 어디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그것조차 지금 모르잖아요. 언젠가 장례를 치르겠지만, 집사람을 온전한 상태로 보내주고 싶어요. 저랑 장모님은 여태껏 아리셀 대표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어요. 뉴스 보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죠. 노무사, 변호사 통해서 합의하라는 메시지만 와요. 박순관(아리셀 대표)을 만나면 '살려내라'고 할 거예요. 내가 집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김씨는 이날도 아침저녁으로 화성시청 1층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아내의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 내려놓은 그는 늘 그렇듯 안부를 전했다.
"여보, 잘 잤는가. 잘 있었는가. 보고 싶다. 하늘에서나마 아프지 말고 잘 살아. 내가 우리 아들만큼은 잘 키울게. 마음 놓고 떠나가."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화성시청 1층 합동분향소에 안치된 아내의 영정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
ⓒ 소중한 |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씨의 남편 김일씨가 29일 오후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 가족 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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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셀 희생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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