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정은 "中 눈치 보지 말라"…푸틴 만난 뒤 외교관에 1호 지시
북·러 간 밀착 행보에 중국이 거리를 두며 북·중 관계에 이상 기류가 포착되는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에서 근무 중인 북한 외교관들에게 “중국 눈치를 보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또 북한 내에서 화교의 이동을 제한하는 등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반발을 행동으로 옮기는 분위기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30일 중앙일보에 "최근 주중 북한 공관에 '중국 눈치 볼 것 없다'는 김정은의 지시가 담긴 포치(공지)가 내려왔다"며 "현지에선 당분간 북·중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의 '1호 포치'가 내려온 시점은 이 달 들어서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북해 김정은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은 게 지난달 19일인데, 그 이후 이뤄진 조치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향후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활동해도 괜찮다는 허가를 김정은이 직접 내준 것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해외 공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인 불법 밀수, 현금 및 사치품 조달, 각종 첩보 수집 같은 움직임이 더 활발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북·중 간 이상 기류는 지난해 9월 김정은이 러시아에 방문해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간 협력을 파격적으로 강화하기로 한 이후부터 꾸준히 포착되고 있다. 불법 군사 거래를 축으로 한 김정은과 푸틴의 밀월을 바라보는 중국의 입장은 '북·중·러 연합의 일원처럼 보일 생각이 없다'는 데 가깝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긴장 관리에 합의하면서 한·일·중 정상회의 참여 등을 통해 한국, 일본과 관계 개선을 꾀하는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와 관련, 중국은 김정은이 2018년 5월 중국 다롄(大連) 방문 당시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과 산책하며 친교를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발자국 동판'을 지난 5월 제거했다.〈중앙일보 6월 11일자 1·5면 보도〉 또 이달 초에는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인 자국 내 북한 노동자를 모두 귀국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북한은 지난 5월 27일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포함한 공동선언을 채택하자 당일 밤 군사정찰위성 2호를 발사하며 반발하기도 했다.
북한 내부적으로 중국과 '민간 가교' 역할을 담당해온 화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동향도 나타나고 있다. 한 소식통은 "최근 북한 당국이 화교의 거주지 이탈을 제한하고, 북한 주민의 화교 가정 출입도 단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통용되는 위안화 결제도 일부 막혔다고 한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민은 "기존에는 평양 내 시장에서 위안화 결제가 가능했으나, 현재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통일부가 지난 2월에 발행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2016~2020년 장마당에서 유통된 화폐 중 위안화가 차지한 비율은 68.4%로, 북한 원화(25.7%)의 두 배를 넘어섰다.
외부 사상 유입을 막는 차원에서 주민의 한류(韓流) 접촉을 적극적으로 차단해온 북한 당국이 최근에는 중류(中流)까지 막는 것으로 단속의 범위를 넓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 당국이 지난 수개월 동안 주민과 군인을 대상으로 중국 영화 시청을 금지했다"며 "중국 영화가 담긴 저장 매체를 압수한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중앙TV를 비롯한 북한 관영 방송의 외화 코너에선 중국 영화를 방영하는 비중이 급격히 줄었다. 이는 지난달 푸틴의 방북 전후로 구소련 당시 제작된 러시아 영화를 집중적으로 방영한 것과도 비교된다.
공식 행사에서도 양측은 서로에 대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분위기다. 미국의 북한전문 매체인 NK뉴스는 29일(현지시간) 북한이 지난 27일 밤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을 맞아 평양체육관 광장에서 진행한 6·25전쟁 상징 종대 행진 행사에 왕야쥔(王亚军) 북한 주재 중국 대사가 참석하지 않아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NK뉴스는 각국 외교 사절이 참석한 행사에서 북한의 혈맹이자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대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데 대해 "매우 이례적"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앞서 지난 11일 평양에서 열린 북·중 우호조약 체결 63주년 기념 연회에 북측 대표로 조중친선의원단 위원장인 김승찬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참석한 것을 두고도 의도적으로 격을 낮춘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북한의 국회부의장 격인 강윤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북·중 간 교역 규모가 급감한 것도 눈길을 끈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북한이 올해 상반기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쌀은 571만 3000달러(약 80억원) 규모로, 지난해 같은 기간 5339만 2000달러(약 739억원)의 10분의1 수준이라고 미국의소리(VOA)가 이날 보도했다.
앞서 지난 2016년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 고강도 전략 도발을 반복하는 데 대해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채택에 찬성하고 제재 이행에 동참하는 등 대북 압박 기조를 보였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에도 북한은 자국 내 화교의 통행증 발급을 제한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와 달리 중국은 북한이 내세우는 반미 노선과 전략적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모습"이라며 "중국이 대북 제재 무력화나 군사기술 지원 같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기 전까지 양국 관계는 당분간 소원해 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북·중 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양국 관계는 언제든 급격히 회복될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은 북한을 '길들이기' 하려는 것이지, 최대 후견국으로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 2016~2017년 제재 국면에서 사이가 소원해진 양국은 2018년 들어 북·미 정상회담 국면이 펼쳐지자 다시 밀착했다. 김정은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기 전 시진핑 주석과 먼저 수차례 정상회담을 했고, 시 주석도 2019년 6월 처음 방북하는 등 최고위급 교류도 빠르게 회복됐다.
정영교·박현주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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