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반성은커녕 변명과 폭로 난무하는 회고록
소셜미디어 자기 홍보와 유사
민감한 이슈에 대한 왜곡과
타인 뒷담화에만 치중하면
공적 인물 책임 망각한 처사
선진국답게 국민들을 진실로
가까이 인도하는 노력 절실
학교에서 반성문을 쓰거나 직장에 시말서(경위서)를 제출하는 것 말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문을 쓰는 경우는 거의 드문 일이다. 이런 강제성을 띤 반성의 글들은 거부하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줄어들기에 형식적으로라도 개전의 정을 보여줘야 효과가 있다. 물론 성 어거스틴이나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반성의 진정성이 담긴 참회록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천상의 신을 향한 믿음을 다짐하는 차원이었지 현세의 인간들에게 선처를 구하지는 않았다. 장황한 산문 대신 간결한 시를 통해 시종일관 자신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묘사한 시인 윤동주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참회록’과 ‘서시’를 썼을 뿐일 것이다.
요새 한국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와 사회 저명인사들의 회고록 출간이 빈번한데 이들에게서도 진솔한 반성은 찾기 힘들고 주로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데 치중하는 듯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자기 홍보’가 대세인 마당에 책 한 권에 자기 인생을 멋들어지게 꾸미고 기념하고픈 욕구가 발동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테다. 문제는 특정 이슈에 대한 한쪽 입장만 고집하다 못해 왜곡된 변명만을 잔뜩 늘어놓거나 남의 뒷담화도 서슴지 않고 기록해 나라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며 논란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 지난달 21대 국회가 끝나자마자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를 펴낸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논란의 한편에 섰다. 그는 이태원 참사가 ‘특정 세력에 의해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석 발언을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한 달 가까이 지난 뒤 펴낸 2쇄본에서 이 부분을 수정했다. 그러나 용산을 향해 날아간 비아냥과 증오의 불화살은 이미 초가삼간을 다 태우고 대통령 이미지에 먹칠한 터라 이제 와서 회고록 수정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재임 시절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북 정책에 대한 자화자찬을 넘어 대통령 전용기를 나 홀로 탑승한 부인 김정숙 여사의 인도 타지마할 방문 스캔들을 변명으로 일관하다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더욱 씁쓸한 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회고록이 지난 5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섰다는 점이다. 정치 양극화와 극심한 팬덤 상황에서 문 전 대통령 같은 정계 최고위 인사들의 회고록이 논란이 될수록 인기를 끄는 ‘노이즈 마케팅’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축구 인생 30년을 기록했다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축구의 시대’는 하필 파리올림픽 개막일을 목전에 둔 지난 26일 출간돼 논란을 불렀다. 아시안컵에서 요르단에 참패한 기억에다 파리올림픽 진출 실패, 절차를 무시한 홍명보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 선임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 회장의 때아닌 축구 찬가는 국민 눈엔 허무개그로 비쳤다. 국민들은 인터넷서점 예스24 리뷰란에 한 개짜리 별점을 97%나 퍼부으며 축구 지도자로서의 책임감과 축구팬들과의 소통 부족을 성토하고 있다.
회고록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적 인물로서의 책임감과 진실성, 그리고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사실을 편향되게 기록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심지어 역사의 왜곡까지 부를 위험이 크다. ‘나의 투쟁’을 출간한 아돌프 히틀러의 후일담은 회고록 작성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한 작업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훗날 책 출간을 후회하며 부하들에게 읽지 말 것을 권했는데 당 정책과 배치되는 내용과 체계 없는 문장으로 가득해 세간의 비웃음을 샀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고위 공무원들이 자리를 떠난 뒤 쓴 회고록은 개인 신상에 대한 폭로전보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밝히고, 정책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헨리 키신저의 ‘백악관 시절(White House Years)’, 로버트 게이츠의 ‘의무:전장에 선 장관의 회고록(Duty: Memoirs of a Secretary at War)’, 콘돌리자 라이스의 ‘최고의 명예(No Higher Honor)’ 등은 딜레마 상황에서 왜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뇌와 결단의 과정을 진솔하게 묘사한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 일본을 제친 선진국답게 우리나라에서도 무차별 폭로전 대신 국민들을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양질의 회고록들이 쏟아지기를 기대한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구영배 큐텐 2조 가치였지만… 지금은 ‘휴지 조각’ 평가
- 여친 감금, 바리캉으로 머리 민 20대… 7년→3년 감형
- 할머니 유언에 日국적 버리고 한국행…허미미 값진 銀
- “혼자야?” 12세女 집 찾아가 성폭행 20대 2명…‘불구속’
- 은평구 아파트 정문서 30대가 40대 이웃 흉기 살해
- 시청역 사고 운전자 “돌아가신 분·유족께 너무 죄송”
- 방송인 양재웅, 병원서 女환자 사망에 “참담·사죄”
- “태국인 트렌스젠더와 폭행 시비”… 뇌진탕 호소
- [단독] “그 자들 검찰 맞아요” 1억 넘게 뜯어낸 기막힌 수법
- 100번째 金 반효진 “하늘이 준 기회…이름 남기려 독하게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