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토분 위의 삶

2024. 7. 31. 00:3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각양각색 꽃들이 피어나는 모네의 팔레트 정원을 꿈꾸며, 여러 개의 화분에 아기자기한 식물을 키우고 있다.

한 뼘 너비의 햇살이 점점 커지며 거실 창을 두드리는 이른 아침, 커튼을 걷으려다가 식물 하나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각양각색 꽃들이 피어나는 모네의 팔레트 정원을 꿈꾸며, 여러 개의 화분에 아기자기한 식물을 키우고 있다. 한 뼘 너비의 햇살이 점점 커지며 거실 창을 두드리는 이른 아침, 커튼을 걷으려다가 식물 하나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머지않아 마당 있는 집을 마련하면 정원에서 최고참 노릇을 하리라 여긴 식물이었다. 자주 먹구름이 몰려왔고 볕이 오래 드물었고 퍼붓는 빗줄기가 습도를 높인 게 화근이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축 처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여름은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계절이라 번수라고도 한다는데 토분 위의 작은 생명에 다시 숨을 불어넣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이 죽던 날 이런 글을 남겼다.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오른손을 들어, 태양에게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거셌던 장마가 물러가고 마침내 찾아온 맑은 하늘을 식물이 느끼긴 했을까. 환한 햇살에 스러져 가는 몸을 열어 활짝 웃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마지막 날임을 실감하며 미처 크지 못한 싹을 볕에 내보이려 안간힘을 썼을까.

죽은 식물을 신문지 위에 눕히고 조가비가 붙은 갯바위처럼 흙 부스러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토분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 선반에 놓여 있는 다른 식물들을 천천히 살폈다. 시든 잎과 잔가지를 정리하고 듬뿍 물을 주고 뽀얗게 먼지가 앉은 잎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아직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여린 생명에게 보내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 손길이 닿는 작고 푸른 생명아, 이슬과 햇살과 바람과 나비가 오가는 곳에 꼭 너른 삶을 꾸려주리라. 가만 보니 나와 식물의 삶에 공통점이 있었다. 지극히 당연해 완전히 잊고 지냈다. 우리는 하나의 태양에 기대 사는 땅 위의 존재라는 걸.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