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탄핵이 시대정신일 순 없다

고정애 2024. 7. 3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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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DNAY편집국장대리

때로 민주주의는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방식으로도 무너진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이 후속작에서 든 예는 페루다.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무능한 상태라고 의회의 재적 3분의 2가 판단할 때 대통령직은 공석이 된다’(탄핵)는 헌법 규정이 무기가 됐다. 야권이 대통령직을 공석으로 만들기 위해 재적 3분의 2를 모았고,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무능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사안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도덕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사안에 ‘도덕적 무능’의 법리를 적용”해서다.

이른바 ‘대통령 사냥 시즌’이 시작됐다. 2018년 쿠친스키 대통령이 탄핵 표결 전에 사임했다. 2020년 11월 후임자인 비스카라도 ‘도덕적 무능’을 이유로 물러났다. 2021년 선출된 카스티요도 의회의 탄핵 시도 끝에 이듬해 12월 관뒀다. 저자들은 “대통령 탄핵은 이제 산수(算數)의 문제가 됐다”고 썼다.

「 야 지도부선 "내가 탄핵" 경쟁
탄핵을 정치 무기 삼는 건 잘못
대통령도 변화 요구 외면 말아야

어디서 본 듯하지 않나. 한때 우리에게 탄핵은 금기어였다. 일부 보수 세력이 가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도만 의미 있는 시도였다. 탄핵이 갖는 예외적·최후적 비상수단이란 본질 때문이다. 하지만 거야(巨野)에 의해 일상어가 됐고, 통상적·선제적 일반 수단이 됐다. 그리하여 최초의 판사 탄핵안 가결은 최초의 국무위원 탄핵안 가결로 이어졌고 최초의 검사 탄핵안 가결이 뒤따랐다.

방통위에선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면 방통위원장이 물러나는 일이 두 차례 반복됐다. 급기야 방통위원장 직무대행(부위원장)도 같은 운명이 됐다. 이젠 방통위원장 후보자에게 “후보자 꼬리표가 떨어지면 탄핵당할 것”이란 예고까지 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탄핵도 정지 작업 중이다. ‘탄핵 국민동의청원 청문회’란 기괴한 방식의 청문회를 열었고 이런저런 논란이 많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김 여사가 불출석하니 그걸 빌미로 또 탄핵을 키우고 있다.

정청래 국회 법사위원장이 지난달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 회의 도중 자리를 빠져 나가고 있다. 오전 10시 채상법특검 관련해 법사위가 열린다. 전민규 기자


야당 지도부 선출 과정은 탄핵 의지를 벼르는 무대가 되고 있다. 누가 더 먼저 밝혔는지, 누가 더 강한지로 경쟁한다. 최고위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44번이나 ‘탄핵’ 유의 단어가 등장했다고 하지 않나. 누군가는 “지금의 시대정신은 탄핵”이라고도 외쳤다.

그 정도로 헌법이나 법률 위반 정도가 심해졌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다. 진보 다수인 헌법재판소가 이미 여러 차례 기각 결정을 했다. 탄핵 대상에 오른 검사 대부분이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 수사 관련인들이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는 사유 중에 ‘대통령이 전쟁 위기를 조장하며 평화통일의무를 위반했다’도 있던데 김정은에게 따질 얘기 아닌가. 거야의 탄핵은 그저 탄핵할 힘이 있으니 탄핵하는 것이다. 망치를 들었으니 때리고 보는 심리다. 그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테고 말이다.

옳은 길이 아니다. 탄핵은 우리가 합의한 국가운영 프로세스에 절단면을 내는 것이다. 봉합되기보단 덧나기 쉽다. 일방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이다. ‘박근혜 탄핵’이란 폐허에서 몸을 일으킨 문재인 정권이 통합 대신 적폐청산을 택했을 때부터 항로는 뒤틀렸다.

물론 지금의 탄핵안 대부분은 헌재가 외면할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두려운 건, 탄핵이 일상적 정쟁 도구화하는 데 따른 후과다. 더한 정쟁, 더한 공백으로 이어질 게 뻔해서다. 민주당이 크게 잘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에게도 문제는 있다. 민심에 반응해야 할 때 외면해, 더한 냉소와 반발을 불러서다. 책임론의 시선을 민주당이 아닌, 자신에게 머물게 했다. 한 정치전문가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진 않겠지만, 탄핵을 방임하는 심리”라고 진단했다. 윤 대통령이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탄핵이 시대정신일 순 없다. 정치인의 책임성을 묻는 장치가 선거여야지, 탄핵일 순 없다. 우린 페루가 아니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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