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인생]"사주가 과학이고 통계라고? 그게 혹세무민"
『사주는 없다』쓴 이재인 박사 인터뷰
" 퇴행의 시대. " 여야 막론 저질·막말로 얼룩진 정치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지금 곳곳에서 퇴행을 겪고 있다. '근대에서 전근대로의 역행'이라 불러도 무방할 역술(曆術)·무속(巫俗)의 대중적 인기도 그중 하나다.
역술·무속이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 적은 물론 없었다. IMF 경제위기 땐 대학에 관련 학과가 생기는 등 반짝 붐이 불었다. 하지만 구한말 서양의학의 보급과 일제의 미신 타파 정책 이후 오로지 음지에서, 그것도 정치인·사업가 등 일부에서만 암암리에 행해져 왔다. 무당과 역술인은 천시받았고, 그들의 고객 역시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드러내놓고 점사(占辭)를 믿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역술·무속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칩이 등장하고 인공지능(AI)이 이미 인간의 많은 기능을 대신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양지로 올라온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대세로 자리 잡았다. '범죄도시4'를 누르고 올해 가장 많은 관객(1191만명)을 동원한 영화는 무당과 풍수사가 한국에 자리 잡은 일본 귀신과 맞서는 '파묘'이고, '나는 솔로'를 누르고 화제성 1위를 한 연애 프로그램은 외모가 매력적인 힙한 MZ세대 무당·퇴귀사·역술가를 등장시킨 '신들린 연애'이니 하는 말이다. 정치권의 무속인 관련 루머도 유례없이 심해졌고, 세계를 호령하는 K팝 기업에서조차 무속 경영 얘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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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지에서 대세 떠오른 역술·무속
지식인 가세로 더 큰 대중적 인기
근거·통계 없이 "과학" 과대포장
사회적 책임감 있는지 자문해야
」
'파묘' 속 세련된 무당 화림(김고은 분) 말마따나 지금 대한민국에 뭐가 나왔나 싶다. 겁나 험한 게.
그런데, 이런 폭발적인 역술·무속 트렌드에 정색하고 반기 든 인물이 있다.『사주는 없다』를 쓴 독일 유학파 이재인 박사(64·베를린공대 인문학부)다. 박사 후 10년 넘게 정식으로 사주를 공부한 이력도 흥미롭지만, "당장 돗자리 펴도 되겠다"는 찬사를 듣던 그가 10년 공부를 스스로 허무는 책을 왜 썼는지 궁금했다. 지난 5일 서울에서 만나 들은 얘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말하나 마나 한 운명을 거부
원래 거부감이 없었다. 전처 등 점집 좋아하는 지인도 많아, 점 보러 자주 다녔다. 그중 인상적인 게 유학 중이던 1990년대 중반 '해방 후 역술인 빅3'로 꼽힌 도계 박재완(1903~92)의 제자로, 내로라하는 정치인·기업인을 단골로 뒀던 노석 류충엽(1931~2008) 선생을 만나러 서울 역문관을 찾았을 때다. 그는 "당장 귀국하라"고 했다. 이 말 듣고 귀국할 바보가 있나 싶어 독일로 돌아갔다. 만약 그 말을 따랐다면 지금 다른 삶을 살겠지만 뭐가 더 나은 삶인지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역술인이 말하는 운명이란 이런 것 아닐까. 하나 마나 한 말. 진짜 운명은 한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공부가 더뎌 이 바닥 최고로 통하는 계룡산 감로사의 낭월 박주현(67) 스님을 찾았고, 우여곡절 끝에 600만원을 내고 일주일에 2시간씩 12회 개인 수업 듣는 거로 본격적인 공부에 발을 들였다. 10주는 사주, 나머지 2주는 작명·타로(오쇼젠)·택일·오주괘(시간으로 점 치는 법)였다. 그렇게 방향 잡고 낭월과 공부를 이어가며 5년쯤 지나 궤도에 올랐을 때 사람들 사주를 봐주면 "족집게"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나중에 철학관 차리면 용돈이라도 벌겠다, 싶었다. 간혹 "안 맞는다"는 이를 만나면 공부 부족이라 생각했다.
몇 년 더 흘러 사주 여덟 글자와 삶의 연관성, 무엇보다 사주 이론 자체의 근거에 의문을 품은 사건이 생겼다. 2021년 한 달 정도 외출과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된 채 여러 사람과 합숙할 적에 심심풀이로 사주를 봐줬다. 평소 보던 만세력(60갑자로 구성된 사주팔자 보는 달력)이 없어 정확한 사주명식(四柱命式)을 못하고 자료실에서 찾은 오래된 만세력으로 했다. 봐준 8명 중 7명이 "대체로 맞는다"고 했고, 서너 명은 "소름 끼치게 맞다"고 감탄했다. 나중에 최신 만세력을 확인했더니 사주명식이 모두 틀렸다. 그런데 다 맞다니, 이게 뭘까.
지식인의 혹세무민이 문제
지난 몇 년 동안 사주명리학 뿌리를 찾으려고 도서관을 뒤져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시대까지 중국 문헌 수십 권 등을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근거는 없었다. 오히려 공부할수록 허점투성이였다. 내 책 속 학술적 설명도 굳이 할 필요 없이 "사주는 통계"라는 세간의 믿음부터 그렇다.
수천 년 축적된 학문이라면 통계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없다. 사주는 경우의 수가 51만 8400가지 있다. 한 명이 한 번씩만 간명(看命·운명을 본다)해도 118년 걸리니 불가능한데, 세대를 이어 축적된 자료도 없다. 또 통계라면 개인적 경험을 넘어 누가 해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역술인마다 다르다. 과학적 증거를 제시 못 한다면 과학이 아니다. 인과적 연관성 없는 점술일 뿐이다. 이렇게 지난 1천여 년 동안 적중률은 높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문 칼럼 기고와 TV 강연 등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부 유명인사들이 사주명리학을 마치 검증된 학문처럼 떠벌리는 바람에 터무니없이 과장됐다. 대표적 인물이 '전업' 역술인이 아닌 고전 평론가 고미숙,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등이다. 이들은 "시한부 인생 선고받고 사주 공부했더니 맞아떨어지더라"(강헌)는 경험을 간증처럼 소개하면서 사주명리학을 과대 포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다. 만담처럼 얘기하면 재미로 넘기면 된다. 유명 칼럼니스트 조용헌이 대중과 역술인에 끼친 영향력은 훨씬 더 커도 그를 비판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사회적 지명도에 더해 전문가의 권위까지 누리는 이들이 본인의 명리학책을 기반으로 고액의 강연·방송을 활발히 하며 "운명의 우주적 거래"(고미숙)라거나 "내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학문"(양창순)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리는 건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혹세무민이다.
특히 양창순은 의학 박사라 역술인에 비할 바 없이 큰 신뢰를 줘서 문제다. 설령 치료에 순기능이 있어도 "우주의 기(氣)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다"며 임상에 활용해선 안 된다.
나 역시 역학 공부 초기 강헌의 광주 강연을 듣고선 실망했지만, 고미숙 작가 책을 읽고는 "이 정도 공부가 깊은 사람이 허황한 거짓을 말할 리 없다"고 전적으로 신뢰했다. 지난해 OTT 티빙 예능 'MBTI vs 사주' 자문을 하면서 일말의 믿음마저 깨졌다. 프로그램 자체도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제작진 얘기가 더 충격적이었다. 자문 과정에서 고 작가에게 물었더니 "근거를 묻는 것처럼 무식한 질문이 없다"며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그나마 말이 통할 거 같아 사주 이론 근거에 대해 같이 논하자고 그에게 써둔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양심상 접은 노후보장 구상
과학도 통계도 아니라 말하면 "귀신같이 맞다"며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랬다. 그건 보편적 특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해석하는 바넘 효과(포러 효과)에다 우연이 겹쳐서다. 용한 점쟁이는 있어도 '항상' 용한 점쟁이는 없는 이유다. 누군가 겪은 우연은 그냥 우연으로 두면 되는데, 셀럽 지식인들이 쓸데없는 의미 부여하며 대중을 현혹한다. 나를 알 수 없는데, 자꾸 진정한 나를 찾느니 출생의 비밀을 알 수 있느니 하며 혹세무민한다. 무엇보다 자꾸 운명 타령하게 하는 폐해가 크다.
물론 순기능도 있다. 내가 독일에서 처음 공부했던 '언어와 현실의 관계'와도 관련 있다. 현실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건 언어이고, 우린 그 언어를 통해 현실을 인식한다. 언어의 힘이다. 사주풀이도 이런 언어의 힘에 의존한다. 가령 점쟁이한테 "내년에 좋은 일이 생길 거"란 말을 들으면 내년이 와야 진짜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기분이 좋다. 반대로 "재수 없는 일에 휘말린다" 소리를 듣는 순간 재수가 없다.
언어와 현실의 이런 관계를 잘 활용하면 힘든 이들에게 따뜻한 말로 희망을 준다. 음지에 있을 땐 실제 이런 기능을 하면서 본질에 더 가까웠다. 양지로 나온 지금은 허세만 부린다. 이걸 다 알아버리고 나니, 양심상 입 다물고 버티다 나중에 조그만 철학관이라도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은 부릴 수 없다. 그런데 셀럽 지식인들이 쓴 책 서평이나 강연 유튜브 댓글을 보면 이미 대중을 완전히 홀린 거 같아 걱정스럽다.
사실 근거를 좇기 시작할 때 스승인 낭월 스님에게 "근거가 없지 않으냐"고 제일 먼저 따졌다. 처음엔 "근거를 따지고 비판적 입장을 갖는 건 훌륭한 자세"라고 격려했는데, 계속 따지니 "농부는 농사 잘 지을 생각을 해야지 밭고랑 몇 개인지 헤아리느라 애쓸 필요 없다"며 에둘러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결국 "빅뱅 이전을 모르는데 어디에서 근거를 찾겠느냐"며 간접적으로나마 근거가 없다는 내 주장을 인정했다.
사주를 비판하는 책을 쓰는 데 2~3년 걸렸다. 다 써놓고 스님에게 누가 될까 봐 낭월 스님이 내 스승인지 밝힐지를 놓고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런 고민을 내비치니 "밝혀도 괜찮다"며 오히려 "이 책이 사주 미신에 빠진 사람들에게 경종이 됐으면 한다"는 덕담을 했다.
모르면 믿게 되고, 믿으면 매이게 된다. 유명세만 믿고 운명 타령하는 대신 모두 팔자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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