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입법 독주 다음엔 ‘현타’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준말이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가 현실을 깨닫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을 뜻한다. 5박 6일 필리버스터를 지켜본 여야 관계자 사이에서 심심찮게 들린 단어다. 여당은 법안을 막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통과시킨 ‘방송 4법’은 곧 대통령 거부권에 막혀 되돌아올 운명이다. 난리를 쳐도 달라진 게 없다. ‘현타’가 오는 이유다.
총선 직후만 해도 야권에선 “22대 국회는 다를 것”이란 기대가 많았다. 국민의힘 의석수가 108석으로 줄면서, 여당 의원 8명만 설득하면 대통령 거부권도 넘을 수 있다는 셈법이 섰다. 더구나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선 여권 내분이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전망이 분분하던 순직 해병 특검법 재표결조차 이탈표는 4표에 불과했다. 여당이 유능해서라기보단 민주당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탓이 크다. 특검 찬성 입장을 밝혔던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두 차례 반대표를 던진 데 대해 “특검은 필요하지만, 민주당 법안은 진실규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며 “1심 재판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한 건 충격적”이라고 했다. 다른 여당 의원은 “민주당이 ‘강강강’을 고집하니 우리가 쉽게 뭉쳤다”고 말했다.
본회의 상정을 앞둔 다른 법안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10개월 만에 다시 올리는 노란봉투법엔 ‘근로자가 아닌 자’의 노조 가입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재명표 공약인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지원금’은 법안에서 액수를 최대 35만원까지 늘렸다. 여당을 설득하려면 쟁점을 줄여야 하는데 거꾸로다. 어쩌면 민주당의 진짜 노림수는 ‘대통령 거부권 유도’가 아닐까.
그간 민주당 내부에선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주저앉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한국갤럽 전화면접 조사(5월 28~30일)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이 21%를 찍자 그런 얘기가 부쩍 퍼졌다. 당시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율이 17%로 주저앉자 임기 단축 개헌론이 나온 것처럼, 윤 대통령도 지지율이 추락하면 임기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그런 상황에 대비해 당 대표의 대선 1년 전 사퇴를 규정한 당헌에 예외 조항을 신설했다.
지난 23~25일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28%였다.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추락은 없었다. 국민의힘 지지율(35%)은 외려 민주당(27%)을 앞섰다. 그새 대통령실은 제2부속실 설치를 준비하며 전열을 정비 중이다. 야권 강성지지층은 머지않아 “왜 탄핵을 못 했냐”고 민주당에 달려들 기세다. 진짜 ‘현타’는 오지 않았다.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오현석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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