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와인의 기분
와인잔 한 세트를 샀다. 기존에 쓰던 것보다 잔이 더 얇았기 때문에 겁이 나서 제대로 건배를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성화 봉송하듯 조심스럽게 건배한 후 왼쪽 귓가로 잔을 가져갔다. “오, 건배 소리가 에밀레종 소리처럼 들려.” “장난 아니다, 무서워서 취하지도 못할 것 같아.” “잔이 좋으니까 기포가 올라오는 속도도 달라, 없던 기포도 만들어주는 거야.” “없던 기포를 만들 리가, 그러면 불량 아니야?” L과 나는 신나게 떠들어대다가 하마터면 잔을 깰 뻔했다.
4900원짜리 와인을 막 개봉한 참이었다. ‘없던 기포도 만들어줄 것만 같은’ 와인잔인데, 그에 비하면 식탁 위의 스파클링 와인은 좀 소박했다. 한 모금 마신 후 중얼거렸다. “아, 역시 너무 싼 건 좀 그래.” 그러자 L이 입술에 손을 대면서 “쉿!” 하는 게 아닌가? 와인이 듣는다는 거였다. 소 두 마리 중 누가 더 일을 잘하느냐고 물었던 황희 정승까지 언급하면서 말이다. 농부는 황희에게 귓속말로 대답했고, 그건 평가될 소들의 기분을 고려한 행동이었다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건 와인 아닌가? 와인의 기분까지 헤아려야 하다니 피곤한 세상이로군. 보란 듯이 더 큰 소리로 “4900원짜리는 딱 그 정도다!” 라고 외쳤더니 L이 와인병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했다. “괜찮아, 우린 2900원짜리거든!”
4900원짜리 와인의 눈치를 보느라 졸지에 2900원짜리, 그것도 1+1 묶음 상품이 된 우리는 이제 더 과감하게 건배한다. 와인병의 라벨을 찬찬히 읽으며 그가 통과한 시간들, 그러니까 포도, 흙, 비, 바람, 햇빛, 땀을 생각한다. 와인은 필사적으로 맛있어지고, 지금 이 순간은 특별해진다. 그를 이름으로 부르면 와인은 멀리서 온 여행자처럼 대답한다. 식탁 위의 잔은 두 개지만 셋이서 마시는 느낌이 든다. 와인의 기분을 상상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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