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의 마음 읽기] 알맞은 옥수수
여름이 되면서 동네에 찐 옥수수를 파는 곳이 많아졌다. 작업실에서 내려다보이는 길가 가로판매대에선 지난달부터 ‘정선 찰옥수수’를 팔기 시작했고, 뒤편 상가 건물에 있는 깔세 매장의 품목도 얼마 전부터 ‘당일 새벽에 수확한 옥수수’로 바뀌었다. 날이 선선해지면 언제 그 매대들이 철수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여름이 가기 전에 하루하루 부지런히 옥수수를 사 먹기로 했다.
어려서는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까지도 옥수수를 갖가지 방식으로 먹었다. 추석이 지나 껍데기가 노랗게 마르면서 옥수수가 다 여물고 나면 엄마는 그 옥수수들을 방앗간에 맡겨 껍질을 까왔다. 거피(去皮)한 옥수수에 팥을 섞어 소금과 설탕을 넣고 오래오래 끓이면 달콤하고 쫀득한 옥수수범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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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따 갓 쪄낸 한여름 풋옥수수
인생 고비때 우리를 지탱해주고
도심의 단짠단짠한 매대 옥수수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 유지해줘
」
은근한 불로 오랜 시간 졸여지던 겨울 간식들은 엄마의 노동과 살핌이 담긴 먹거리들이었고, 나와 동생들은 그 음식들이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지탱해줄 인자가 될 거라는 걸 모른 채로 먹고 또 먹으면서 키를 키워왔다.
식구들 모두 겨울의 옥수수범벅을 사랑했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한 건 밭에서 막 따 갓 쪄낸 한여름의 풋옥수수였다. 옥수수 없이 어떻게 여름을 날 수 있을까. 그 맛과 향이 몸에 새겨져 있는 나에게 지금 동네 매대의 옥수수들은 아쉬움을 줄 수밖에 없는 맛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불시에 시간 여행을 시키는 마들렌 효과를 내는 맛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작업실 책상에 놓고 먹을 수 있기도 하다.
어떤 감각은 의식적으로 차단해야만 자신이 원하는 걸 보전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중에는 특히 그렇다. 지금 내게 필요하지 않은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음악은 듣지 않는 게 좋고, 내 고요와 집중을 방해할 마들렌들은 굳이 맛볼 필요가 없다.
독자들이나 소설가 지망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종종 세상을 향해 모든 감각을 열어놓아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지만, 막상 내 감각을 낱낱이 깨울 무언가가 작업실 밖 매대에 대기 중이라고 하면 나는 그 앞을 피해 다닐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이나 사랑·회한 같은 깊은 감정들은 내가 원할 때만 느끼고 싶다는 불가능한 생각을 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통제력은 잃지 않게 되기를 바라면서. 때로는 아주 냉한 인간인 채로 온도 높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성인이 되어서 먹은 어떤 옥수수도 내가 어려서 먹던 옥수수 맛과 같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 번 가장 유사한 맛을 내는 옥수수를 먹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사찰명이 기억나지 않는 한 절의 법당에서였다. 좌복 위에 앉아 있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가던 한 보살님이 내게 옥수수를 하나 건네주었다. 알갱이가 군데군데 짓무른 채 비닐랩에 쌓여 있는 옥수수였는데 생긴 모양만 봐도 맛있는 옥수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옥수수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그 후로도 나는 법당에서 먹을 걸 건네주는 사람들을 간혹 만났다. 자유시간이나 핫브레이크 같은 초코바를 건네주는 분도 있었고, 몹시 추운 겨울일 때는 좌복을 깔고만 앉지 말고 무릎 위에 덮고 있으라고 하면서 하나 더 건네주고 가는 분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내 엄마 또래의 여성들이었는데 가까운 이에게서 받는 농도 짙은 사랑보다 모르는 이에게서 받는 가벼운 호의가 때론 훨씬 즐거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법당들에서 알게 된 것 같다.
아직은 7월 말이라 여름이 한참 남아서인지 가로판매대 옥수수 가게도 깔세 매장의 옥수수 가게도 성황 중이다. 폭우나 폭염이 심한 날 가로판매대 옥수수 가게가 문을 닫으면 어쩔 수 없이 깔세 매장 옥수수 가게로 갔지만 나는 두 집 중 가로판매대 쪽을 훨씬 좋아한다.
가로판대매 사장님이 법당에서 먹을 것을 주던 이들과 비슷한 또래여서인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옥수수가 알맞게 맛있기 때문이다. 옥수수 본연의 즐거움을 주면서도 내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될 수 있게 감각을 적절히 차단해 주는 맛. 단짠단짠한 매대 옥수수 맛.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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