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바라카 신화…‘K원전 르네상스’ 기대
한국이 치열한 경쟁 끝에 체코 원전 수주 잭팟을 터뜨렸다. 문재인정부 탈원전 정책 이후 위축됐던 국내 원전 산업이 다시 부활의 날개를 펼 수 있을지 재계 관심이 뜨겁다.
24조 잭팟…원전 10기 수출 청신호
체코 정부는 지난 7월 17일 체코 남부 두코바니 지역에 1000㎿ 규모 원전 2기를 짓는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 컨소시엄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체코 정부는 인근 테멜린 지역에 원전 2기를 추가로 건설할 경우 이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 역시 한수원으로 선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수원은 이번 입찰에 두산에너빌리티, 대우건설, 한국전력기술, 한전KPS, 한전원자력원료 등과 ‘팀코리아’ 컨소시엄을 이뤄 참가했다. 본계약은 내년 3월 체결될 것으로 보인다. 한수원은 2022년 3월 이후 2년 넘게 진행된 수주 경쟁에서 프랑스전력공사(EDF)를 제치고 수주에 성공했다.
체코 정부에 따르면 두코바니 원전 2기를 짓는 사업비는 약 4000억코루나, 우리 돈으로 24조원에 달한다. 20조원이 들어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체코 정부 약속대로 테멜린 지역 원전 2기 건설 계약까지 추가로 따내면 총 사업비는 40조~50조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해외 원전 수주는 2009년 UAE 바라카에 한국이 독자 개발한 차세대 원전 모델(APR1400) 4기를 처음 수출한 이후 무려 15년 만이다.
한국이 ‘원전 대국’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 원전 수주를 따낸 비결은 뭘까.
가성비, 즉 가격 대비 성능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팀코리아가 이번 수주전에서 체코 정부에 강조한 것은 ‘온타임 온버진(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 시공)’이었다. 앞서 한국은 2011년 UAE 바라카 원전 착공 이후 3년 만인 2014년 1호기 설치를 완료했다. 다른 나라들은 대형 원전 1기를 짓는 데 최소 6년에서 최대 10년이 걸리지만 우리는 설치 기간을 앞당겼다. “사막이라는 가혹한 조건에서도 약속한 납기를 맞춘 경쟁력을 체코 정부가 높이 샀다”는 것이 산업통상자원부 설명이다.
프랑스의 반값에도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도 승리 비결로 손꼽힌다. 세계원자력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원전 건설 단가는 ㎾당 3571달러로 프랑스(7931달러), 미국(5833달러) 등 경쟁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에도 한수원은 프랑스전력공사보다 저렴한 단가를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이번 수주로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수출하겠다’는 정부 목표 달성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체코 이외에도 추가 수주를 기대할 만한 물량이 적잖다.
한국과 폴란드 정부는 2022년 폴란드 퐁트누프 지역에 1400㎿ 규모 원전 2기 건설을 위한 양국 기업 간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영국과도 신규 원전 건설 관련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자립 중요성이 커지면서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등 유럽 국가가 잇따라 신규 원전 건설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만큼 추가 수주 기대도 커졌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체코를 시작으로 폴란드,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수주 소식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 기업이 주도하는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이 계속 커지는 점도 한국 기업에 호재”라고 내다봤다.
이번 원전 수주를 계기로 문재인정부 탈원전 이후 침체된 K원전 산업이 다시 르네상스를 맞을지 기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6월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원전’을 공식화했다. 이후 국내 원전 산업은 급격히 위축됐다. 2017년 23조8000억원이던 국내 원전 관련 기업 매출은 2021년 21조6000억원으로 줄었다. 고용 규모도 같은 기간 3만7000명에서 3만5000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다 2022년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탈원전 정책 폐기’를 선언하면서 원전 생태계가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윤석열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 8개월간 원전 설비 수출 계약은 총 105건으로 집계됐다. 금액으로는 4조원을 넘는다. 문재인정부 5년(2017~2021년) 동안 계약한 금액(6000억원)의 6배를 웃돈다.
원전 생태계가 서서히 회복되는 상황에서 체코 원전 수주 잭팟으로 국내 원전 산업이 ‘제2도약기’를 맞을 기회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전 사업을 수주하면 비단 원전 건설 효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발전소 운영과 시설 유지·보수, 원전 연료 판매 등 운영, 관리 사업까지 도맡는 만큼 파급 효과가 상당하다. 체코 원전 수주만 놓고 봐도 두산에너빌리티, 대우건설 등 원전 건설회사와 1000여곳의 원전 부품사가 현대차 쏘나타 174만대, 30만t급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28척 이상을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효과를 누릴 전망이다. 중소기업중앙회는 논평을 내고 “대기업에 납품하는 수많은 원전 중소기업에도 낙수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원전 수출 지원법 마련 필요성도
물론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는 아니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 처리 특별법이 여전히 국회에서 공회전하는 탓에 향후 수출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최근 “유럽연합(EU)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는 2050년까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 확보에 관한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규정한다”며 “원전 상위 10개국 중 방폐장 부지 선정에 착수하지 못한 국가는 한국과 인도뿐이다. 방폐장을 마련하지 못하면 유럽 원전 수출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EU는 2022년 친환경 투자 기준인 택소노미에 원전 산업을 추가하면서 ‘2050년까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하는 처분장 마련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EU 대출 지원 등 해외 금융 측면에서 한국 입지가 불리해질 것이라는 우려다. 다른 유럽 국가 원전 수주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고준위방폐장을 설치할 근거를 담은 고준위특별법이 여야 대치로 수년째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3건의 고준위 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저장시설 용량을 놓고 야당이 반대하면서 끝내 폐기됐다. 이번 22대 국회에서도 4건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채해병 특검법 등 정쟁에 휘말려 제대로 된 논의도 시작하지 못했다.
지금은 미봉책으로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뒀는데, 2030년부터는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포화 상태를 맞는다. 향후 원전 출력을 줄이거나 운영을 아예 중단하는 처지에 내몰릴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고준위방폐장은 당장 건설을 시작해도 완공까지 30년 넘게 소요되는 만큼 원전 수출뿐 아니라 국내 전력 수급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루빨리 결정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고 전했다.
멀리 보면 정권이 바뀌더라도 한국 정부가 원전 산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혹여 새 정권이 또다시 탈원전을 추진하면 원전 부품, 서비스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만큼 이런 불안감을 없애줘야 한다는 의미다. 같은 맥락에서 원전 수출을 꾸준히 지원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0호 (2024.07.31~2024.08.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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