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문 통해 의병 모아 왜병과 싸워
[김삼웅 기자]
▲ 최익현의 병오창의(무성서원) 최익현은 을사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의병봉기를 하였다. |
ⓒ 태산선비문화관 |
을사늑약 이후 조선사회는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대비되어 나타났다. 포악무도한 일제의 통감정치에 주눅이 들어 순종하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의병전쟁을 들불처럼 일으켰다. 통감부는 한국인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전국에 군과 경찰을 배치하고 의병 학살을 지휘했다.
면암은 이 해, 윤 4월 8일 용추사에서 지역의 선비 기우만을 만나 거사를 의논하였다. 남도의 선비 50여 명이 모이고, 면암은 격문을 써서 이들에게 각 고을에 전파하여 의병에 참여토록 하였다.
(중략) 변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건만 토벌을 꾀하는 사람은 왜 하나도 없단 말인가? 임금이 없어지면 신하가 어찌 살아가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떻게 보존되겠는가? 가마솥의 고기는 멀지 않아 삶킬 것이요, 돌보 위의 제비는 얼마 안 가 불타고 말 것이니 결국은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살아서 원수 놈의 역군이 될진대 어찌 죽어서 충의의 귀신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중략) 무릇 우리 종실(宗室)·세신(世臣)·관찰사·수령 및 선비·농부·공장(工匠)·상공·서리·승려까지도 일제히 분기하여 마음과 힘을 합하여 원수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그 머리를 베고 그 사지를 찢어서 위험을 구하여 나라의 명백을 튼튼히 하고, 비색한 끝에 동태가 와서 인류가 짐승되는 것을 면해야 할지니, 적이 강하다고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정의의 군사가 아니냐! 감히 이와 같이 통곡하노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하략) (주석 1)
면암의 격문이 각지로 전파되자 많은 애국 청년들이 호응하였다. 며칠 안에 면암의 의병부대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정읍 내장사에서 잠시 머물던 의병부대는 순창 구암사로 이동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다, 이 때 왜군이 정읍까지 왔다는 정보에 따라 순창 근교로 부대를 옮기고, 순창 성외에서 왜구 부대를 추적하여 10여 명과 격전 끝에 물리쳤다.
사방의 애국 청년들이 최익현 의병 부대로 몰려와 그 수는 800명으로 늘어났다. 큰 소매가 달린 옷을 입은 자와 총을 든 자가 각각 절반이었다.
이날 본읍에서 군사를 먹이고 출발하여 옥과(玉果)로 향해 겨우 두 마장을 행군했을 때 요란한 총소리가 북쪽에서 들려 왔다.
의병들이 재빨리 좌·우익으로 나누어 복병하고 기다리는데 척후병이 와, "삼방 포수 50여 명이 순사 한 명을 죽이고 옵니다."하고 보고하였다.
이에 의병 부대는 다시 행군하여 순창읍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이날 밤 본읍 군수 이건용이 소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 이 때 최익현 의병 부대에 총을 가진 자는 200명에 불과하였다. (주석 2)
면암의 의병부대가 지역주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세를 키우고 있던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시켜 고종의 칙지라는 것을 보내왔다. 의병을 모두 해산하라는 엉뚱한 서찰이었다.
이때 전주 지방의 일본인 경찰대가 출동하여 교전이 있었으나 의병진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그 후 8일에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곡성(谷成)에서 무기와 병력을 증강시키고, 9일에 오산촌(鰲山村)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여기서 각지에 전령을 보내어 퇴휴병 등을 증모하여 의병 수는 9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정부에서는 최익현 의병진의 이와 같은 활동 보고를 듣고, 곧 전라북도 관찰사로 하여금 진위대를 출동시켜 수령들을 체포하고 군사들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하는 한편, 황제의 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마침 최익현 의병진은 6월 11일에 담양 방면으로 행군하려고 준비를 서두르다가 관중 진위대의 한 소대로부터 관찰사 이도재가 보내는 황제의 해산 조칙과 관찰사의 고시문을 받았다. 최익현은 이를 받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것은 오적배(五賊輩)가 천자를 끼고 호령하는 수단이다. 설상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사직을 평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이라면 옛날 사람들도 임의로 행동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이것은 황제의 뜻을 빙자하고 남모르게 만들어 낸 거짓 왕명임에랴! 고 하면서 관찰사에게 "지방을 맡은 신하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복종할 수 없다는 회답을 보냈다. (주석 3)
주석
1> 김의한, <항일의병전>, 57쪽, 정음사, 1975.
2> 앞의 책, 60쪽.
3> 윤병석, 앞의 책, 98~9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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