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악인은 없다, 그저 욕망 때문일 뿐
[김상목 기자]
▲ 영화 <샤인>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박석영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개봉영화 <샤인>을 보았습니다. '메인스트림'이라 불리는 상업영화판에 진출하지 않고, 본인만의 작가적 비전을 위주로 장편영화를 10년째 작업하는 감독은 국내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개 단편영화에서 창의력과 재기발랄함을 뽐내며 인정받은 다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또래 세대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쯤과 연동해) 상업영화판에서 자리를 잡는 게 일반적인 패턴인데, 박석영 감독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이 감독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복 받은 조건 덕분에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운아라 단정할 수도 있지만, 딱히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의 작품을 빠지지 않고 봐왔습니다. 2014년 <들꽃>에서 출발해 2015년 <스틸플라워>, 2016년 <재꽃>까지 소위 '꽃' 3부작이 완결됐습니다. 그리고 <재꽃>과 묘하게 대구를 이루는 후속작 <바람의 언덕>이 2020년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하는 신작 <샤인>까지 끈덕지게, 이 늦깎이 감독은 쉴새 없이 장편 작업에 매진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그렇게도 간절히 보여주고자 한 걸까요?
그런데 정작 박석영 감독의 영화는 우리가 흔히 '독립영화'에서 기대하는 사회적 메시지나 반영과는 멀찌감치 거리감이 도드라집니다. 한국 사회의 반영이 없지는 않지만, 딱히 구체적인 알레고리나 상징성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상처를 입고 시달리는 주인공이 있고, 그들 주변에는 가끔 좋은 사람이나 친구가 돼줄 이가 등장하긴 하지만 대개 별 도움이 못 되거나 오히려 시련을 주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보고 있자면 괜히 안쓰럽고 마음이 허해집니다.
그런 이야기가 하염없이 반복되지만, 주저앉을 뻔하면서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견뎌내고 돌파하며 쭈뼛쭈뼛 계속 나아갑니다. 그렇다고 위기를 '극복'했다거나 속이 시원한 후일담을 전달해 관객을 안심시켜주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나아갈 뿐입니다. 그런 동어반복 같은 이야기를 왜 감독은 기어코 꾸역꾸역 끌고 나아가는 것인지, 이번에는 대체 무엇을 변주하려는 것인지 파악하려면 그의 영화와 대면해야만 합니다. <샤인>을 만나야만 합니다.
떠남과 만남이 반복되고 교차하는 영화 속 풍경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예선'은 서로 의지해가며 지내던 할머니의 죽음으로 혼자 남게 됩니다. 할머니의 임종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함께했던 성당의 수녀님들은 그런 '예선'이 신경이 쓰여 이것저것 도울 방도를 찾지만, 막상 '예선'은 수녀님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눈치입니다. 오랫동안 예선과 교류해온 중년의 스텔라수녀는 함께 호스피스 활동을 하며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라파엘라수녀에게 예선을 특별히 챙길 것을 요청합니다.
예선에겐 어릴 적부터의 친구 '다희', 그리고 한 살 터울로 보이는 '서우'와 '동석'이 어울림의 상대 격입니다. 다희는 서우와 동석에게 예선을 응원하기 위한 모종의 이벤트를 진행케 하지만, 역시 예선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왜 자신을 동정하게 만드냐며 따져 묻는 예선이 다희는 야속합니다.
둘은 다투고 다희는 예선의 집을 한밤중에 나섭니다. 심란해진 예선은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던 라파엘라수녀에게 전화를 겁니다. 라파엘라수녀에게 할머니의 유언을 묻고 한참 뒤에 답을 들은 예선은 생각을 바꿔 다희를 찾아 나섭니다.
다희는 가로등 아래에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선을 보자 뚜벅뚜벅 다가온 다희는 두 팔을 벌리고 친구를 맞이합니다. 그렇게 둘은 화해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집으로 함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라파엘라수녀에게 마치 결과를 보고하듯 둘의 다툼과 화해 사실을 공유합니다.
그 수다스러운 상황을 겪고 나니 라파엘라수녀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불을 끄고 늦은 잠을 청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두워지는 화면에 새겨지는 한 줄기 빛처럼, 영화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샤인>, 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여기까지 30분쯤 걸렸습니다.
계절이 바뀐 듯합니다. 냉기가 느껴지던 풍경이 어느새 매미 소리가 진동하는 때로 변했습니다. 예선은 고등학생이 됐고, 학교는 다르지만 다희와도 여전히 어울려 다닙니다. 서우와 동석도 곧잘 함께 합니다. 라파엘라수녀는 출퇴근하듯 예선의 집을 방문합니다. 아이들은 수녀들과 함께 소풍을 다닐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됩니다.
보기 드문 평온한 풍경에 괜히 불안해질 즈음, 예선의 집에 6살 여자아이가 동네 할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섭니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온 예선과 다희는 빈집에서 그들을 맞이한 낯선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고 정리됩니다. 여기까지, <샤인>이었습니다.
▲ 영화 <샤인>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영화의 시작부터 '예선'은 혼자 세상에 남게 됩니다. 외삼촌이 법적 보호자로 등재돼 있지만(그 덕분에 보육원에 가는 일은 면합니다만) 그는 육지에 나가 있고 생활이 불안정해 시작부터 끝까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주변의 수녀와 친구가 그를 안쓰럽게 여기며 보살피는 것 같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선은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운 눈치입니다. 모종의 사정 때문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일찌감치 세상인심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예선은 하지만 홀로 세상에 나서기엔 모든 게 부족합니다. 기댈 곳이 필요하고 스스로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가기엔 법과 제도 관련 조건도 충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예선에게 수녀님들과 다희를 비롯한 소그룹의 또래 집단은 감내하며 받아들여야만 할 '현실'입니다.
예선도 충분히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많은 걸 겪은 그에게 이 모든 게 온전하게 영속적일 리 없다는 것,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난하고 불쌍한, 그래서 받기만 하는 대상으로 취급되는 게 썩 내키진 않습니다. 예선의 상황은 대충 그렇습니다.
그런 예선에게 마치 선물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내려오듯 너무나 자신과 닮은 꼴의 6살 여자아이 '새별'이 등장합니다. 아마 천애 고아가 된 자신의 처지가 겹쳐 보였겠죠. 어쩌면 예선이 할머니와 살게 된 시초가 그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선은 새별을 돌보면서 부쩍 웃음이 많아지고 들떠 있습니다. 스텔라수녀의 배려로 라파엘라수녀가 거의 붙박이로 집에 들러주기에 텅 빈 집에는 오랜만에 웃음소리와 사람 냄새가 피어납니다. 라파엘라수녀, 예선, 새별은 이색적인 '성가정'의 풍경을 자아냅니다. 보는 이들도 흐뭇해집니다.
하지만 이 '성가정'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알 수 없지만, 관객은 이미 그 태생적 균열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저 행복한 풍경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지기를 소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라도 정이 들대로든 이들은 상처를 품고 이별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사랑이 깊었기에 그 자국도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속 모든 이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그 상실감을 견뎌야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에 대한 대처와 상황 조건이 이들의 본질적 위치를 새삼 각인시켜줍니다. 누가 진정으로 새별을 마음으로 보듬었는지는 고스란히 비례하듯 그만큼 질량의 상처로 변환됩니다.
예선은 또다시 외톨이가 된다는 걸 견딜 수 없습니다. 주변의 누구도 순전한 악의를 품지 않았음을 그는 너무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선은 고작 10대 중반에 불과합니다. 또래보다 더 현실적이고 '어른'처럼 생각할진 몰라도 그 홀로 감당하기엔 어깨가 너무 무겁기만 합니다. 그래서 성질도 간혹 부리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예선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 영화 <샤인>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그래도 다행인 것이, 예선에겐 수녀님들이 있긴 합니다. 스텔라수녀와 라파엘라수녀는 예선에게 기꺼이 피난처가 돼 주려 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전하려 애씁니다. 그들이 머무는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라는 공간 자체가 피난처로서 기능합니다.
'새별'이 처음 홀로 남겨진 곳도 예배당이었고, 새별을 맡게 된 예선과 모의(?)를 마친 다희가 작전 수행을 위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스텔라수녀도 스스로 풀기 힘든 난제에 처했을 때 찾습니다. 하지만 그저 건물만으론 온전히 해야 할 몫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건물도, 제도도 온전히 풀지 못하는 여백은 결국 사람의 선의가 채워야만 합니다.
영화 내내 예선을 괴롭히는 건 (물론 일정하게 제약을 줄 테지만) 돈이나 물적 지원이 아니라 평범한 또래는 당연한 듯 누리는 일상과 가족의 보이지 않는 울타리입니다. 언뜻 그저 근사한 제주 해변의 여름날 풍광을 돋보이게 하려는 효과처럼 흘러가는 서우와 동석의 근심이라곤 엿보이지 않는 경쾌한 잡담과 보드 놀이는 예선에겐 다가설 수 없는 '카프카의 성' 같은 대상일 뿐입니다.
(전작 <바람의 언덕>을 연상하게 만드는) 스텔라수녀와 라파엘라수녀 역시 각자의 사연을 품고 수도자가 됐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그들은 병든 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활동을 맡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시험에 들게 됩니다.
한참 고참인 스텔라수녀의 계획대로 젊은 라파엘라수녀는 예선과 유사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스텔라수녀의 정교한 설계로도 모든 걸 예측할 순 없습니다. 그들 모두 시련에 처하고 해답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신앙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저 경험치로 치부하기엔 그들은 한순간, 한순간 진심으로 부딪혀 왔기에 쉽게 우회하기도 곤란한 노릇입니다.
그들 역시 사제를 찾고, 길 위에서 신을 향해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연민했기에 처하는 고통입니다. 이 지점에서 다른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깊이가 확연히 갈라집니다.
물론 <샤인>에는 우리가 '악인'이라 규정할 존재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 모두 선한 의도를 품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직 인간으로 온전히 자립하고 성숙하지 못했거나, 혹은 너무나 평범한 욕망 때문에 서로에게 원망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뿐입니다. '다희'는 '예선'이 부러워할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지만, 자신만이 유일하게 예선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묘한 강박적 욕망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둘은 묘하게 결정적 순간마다 엇갈립니다. '애증'에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그런 자석의 양극 같은 사연을 품고 둘은 붙었다가 떨어졌다 하기를 거듭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만의 '성가정'은 붕괴할 운명입니다. 세상의 질서가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좌절을 겪고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합니다. 당장 빚더미에 올라앉았다거나, 혹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보일 (한국독립영화가 고장 난 테이프처럼 계속 우려먹는) 극단적 악조건에 처한 건 아니지만, 어린 예선과 그를 온전하게 보호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라파엘라수녀(와 스텔라수녀)까지 모두 길을 잃고 주저앉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재회할 수 있을까요? 그 실낱같은 '어둠 속의 빛'을 찾아 영화 속 주인공들은 물론, 영화를 만든 감독 역시 기약 없는 길을 떠납니다. 감독은 그 여정에 관객까지 함께 해 주길 기대합니다. 너무나 험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선 누구나 그러할 것입니다.
▲ 영화 <샤인> 스틸 이미지 |
ⓒ ㈜인디스토리 |
그렇게 길은 이어지고, 예선은, 라파엘라 수녀는, 그리고 스텔라수녀와 새별(과 그의 엄마)까지 각자의 앞에 펼쳐진 황량한 오르막길에 도전하는 시간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저 낭만적으로 저기에 산이 있으니 오르고, 걸음이 쌓이면 길이 생긴다는 묘사는 이들에겐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가합니다. 적어도 앞으로 그들이 직면해야 할 삶이 험난하고 고단할 것이라는 것쯤은 젠체하는 타인의 충고 없이도 일찌감치 통달한 이들입니다.
유독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화면 정중앙에서 얼굴을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마치 거울을 보듯 그들의 표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들이 품은 속내와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무장을 해제하듯 두려운 마음으로 그렇게 행할 테지만, 관객 역시 '타인의 고통' 앞에 직면해야 하는 부담을 함께 짊어지게 됩니다.
그저 슬쩍 눈으로 흘기며 외면하곤 하던 이웃과 세상의 온갖 슬픔에 그렇게 관객은 마주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처럼, 하지만 온전히 그것을 받아안기란 터무니없이 가공할 괴로움이라는 것을 <샤인>은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 현란하고 빠르게 휙 지나가는 현대 상업영화의 속도감과는 다른 감각으로 영화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기이한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분명 21세기 총천연색 영화인데도 묘하게 고전 흑백영화의 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라는 예술의 원형질을 간접적이나마 겪게 되는 셈입니다.
특히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Close-Up) 되는 순간이 그러합니다. 아마 몇몇 얼굴은 꿈에서 튀어나오거나, 혹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마치 사진 액자처럼 잔상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지는, 개별의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봤나에 따라 다를 테지만요.
이 영화 속 주요인물 모두가 각자의 이유에 따라 '거짓말'을 합니다. 그 거짓말은 요즘 너무나 쉽게, 심지어 무의식중에 저지르는 허언증이나 임시방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속성을 지닙니다. 착한 거짓말은 착한 유괴처럼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 속 인물들이 저지르는 '거짓말'은 개별의 무게와 결단으로 일어나는 행위들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그 순간 최선의 선택으로 저지른 그런 거짓말들이 어떻게 확장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거짓말의 당사자들이 어깨에 짊어지는 과정의 연속운동이 이 영화의 정조를 형성합니다. 너무나 착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쉽게 단정하고 포기하고 말 것들을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입으로 물을 길어 날라 죽은 나무에 싹이 트길 기원하며 벌이는 고행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족이 될진 모르겠으나, 주요 등장인물들과 사건과 유일하게 연결되지 않는 부녀가 등장합니다. 그 아빠가 바닷가를 향해 카메라를 고정해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은 그 인물을 아는 이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서를 촉발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에 응답하는 것처럼, 딸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함께 석양을 응시하고 가족사진을 촬영합니다.
▲ 영화 <샤인> 포스터 |
ⓒ ㈜인디스토리 |
[작품정보]
샤인 Shine
2023 | 한국 | 드라마
2024.07.31. 개봉 | 129분 |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박석영
출연 장해금(예선 역), 장선(라파엘라수녀 역), 정은경(스텔라수녀 역), 송지온(새별 역),
채요원(다희 역), 정주은(서우 역), 노이한(동석 역), 이용화(미카엘신부 역),
문종택(사진사 역), 김효정(사진사의 딸 역), 이계용(할머니 역),
백선아(할머니의 딸 역), 전설희(새별의 엄마 역), 오혜림(북촌리 공무원 역)
제작 제주에스엘 주식회사, 영화사 삼순
배급 ㈜인디스토리
2023 6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 개막작
2023 49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초이스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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