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 못하겠다" 말 듣던 韓작가, 영어소설 '억대 대박' 터졌다
소설가 이미리내(41)의 장편 데뷔작『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위즈덤하우스)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세상에 나왔다.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토종' 한국인 저자가 처음 영어로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스무살 때.
미국 문화에 빠져 대학은 미국으로 갔고 전공은 영문학을 택했다. 교실에서 "가장 말이 없던 학생"이었던 그에게 한 유명한 영문학 교수는 "글 써서 밥벌이 하긴 어렵겠다"고 충고했지만 그는 10여 년 후 장편 데뷔작으로 미국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하퍼콜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은 '슈퍼 신인'이 됐다. 지난해 5월 미국에서 출간된 책은 한국 뿐 아니라 홍콩·이탈리아·스페인·덴마크 등 10여 개국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한국의 한 요양원에서 일하는 화자 '나'가 치매 환자 구역의 괴팍한 노인 '묵할머니'의 인생을 취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평양 인근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스마랑의 위안소로 끌려간 소녀는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향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으로 태어나 북한 사람으로 살다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는" 묵할머니의 인생은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다. 홍콩에 거주 중인 저자를 지난 24일 줌으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어떻게 영어로 소설 쓸 생각을 했나.
A : 대학을 미국에서 다녔는데, 영문학이 전공이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자연스럽게 영어로 소설을 쓰게 됐다. 좋아해서 하긴 했는데, 점수는 형편 없었다. 수업에서 가장 말 없는 학생이었고 작문도 엉터리였다. 교수는 "이걸로 먹고 살 생각 하지 마라"고 하더라.
Q : 그 후로 글쓰기를 단념했나.
A : 졸업 후 한국어로 소설을 써봤지만 잘 안 됐다. 영어로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6년 전이다. 남편 직장 문제로 홍콩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문예창작 대학원을 다녔다. 영어가 공용어라 자연스럽게 다시 영어 소설을 쓰게 됐다.
Q : 어떻게 데뷔하게 됐나.
A : 출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소설책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기저기 물었다. 일단 단편 문학을 써서 미국 문예지에 보내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첫 단편 '뷰티풀'을 썼고 그게 2018년 여름 문예지에 실렸다. 두 번째 단편 '북한 접경지대의 처녀 귀신'도 비슷한 시기 문예지에 발탁됐다.
Q : 단편 '북한 접경지대의 처녀 귀신'은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의 첫 챕터이기도 하다.
A : 처음엔 단편 소설로만 쓸 생각이었는데 아이디어가 이것저것 떠올랐다. 그걸 모아서 장편으로 늘리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소설을 썼고 2021년에 마무리했다.
Q : 하퍼와 계약할 때 기분이 어땠나.
A : 시차 때문에 한밤 중에 연락을 받았다. 믿겨지지가 않았고 밤을 꼴딱 샜다. 처음에 에이전시에서 "경매에 작품을 내겠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미국 출판 시장에서 에이전트가 경매에 작품을 내겠다는 건, 적어도 두 곳 이상의 출판사가 이 작품을 원한다는 확신이 있다는 거다. 경매가 열리자 하퍼에서 입찰을 했고 가장 조건이 좋았다.
Q : 반신반의했던 이유는.
A : 외국인 신인 작가가 쓴,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이지 않나. 영미권 독자들이 좋아하는 조건이 아니다. 또 시간 순으로 쓰여있지 않아서 독자들이 읽기에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매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Q : 외국어는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정설인데, 희귀한 케이스다.
A : 한국에서도 외고나 국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학부 유학 준비도 남들보다 늦게, 성인이 된 후에야 시작했다. 학교에서 영문학 성적은 말아먹었지만 소설은 계속 읽었다. 세상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해보면 의외로 되는 것이 꽤 있다.
Q :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것 아닐까.
A : 아직도 한국어 읽는 속도가 영어보다 세 배 빠르다. 영문학 전공을 했고 영어로 책도 냈지만 지금도 어떤 영문학 작품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괜찮다. 맞는 작품을 찾아서 즐겁게 읽으면 된다.
Q : 소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과 탈북을 겪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어떻게 취재했고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
A : 돌아가신 이모할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모할머니는 최고령 탈북자 중 한 명이었다. 접경 지대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유년 시절 기억에 상상력을 더했다. 오랜 시간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했는데 그 때 만난 탈북자 분들에게도 북한 이야기를 들었다.
Q : 주인공이 위안부로 끌려가 겪는 일이 무척 참혹하다.
A : 그 부분을 쓸 때 특히 힘이 들었다. 한 챕터를 네 달에 걸쳐 썼다. 임신 중이었는데 마무리를 짓고 나니 조기 수축이 올 정도였다. 생존 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와 문헌 기록도 자주 봤다.
Q :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다면.
A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펑펑 울었다.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수백 명을 인터뷰해서 쓴 책이다. 논픽션이지만 영혼이 담겨있는, 문학적인 작품이다.
Q : 차기작은.
A : 한국의 개농장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한국 TV 프로그램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EBS)를 보고 소설을 쓰게 됐다. 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강아지 훈련사를 직업으로 택한 딸이 주인공이다. 혈연으로 묶인 아버지와 딸이 정 반대의 일을 하게 된다. 소재는 개 농장이지만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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