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쇼츠만 넘기는 당신, 뮤지컬 '시카고'의 경고
[안지훈 기자]
▲ 뮤지컬 <시카고> 공연사진 |
ⓒ 신시컴퍼니 |
뮤지컬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주변 지인들도 필자에게 <시카고> 이야기를 하고, 예매 사이트에서는 매진 회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 체감됐다. 한국에서는 2000년에 초연을 올린 후로 꽤 오랜 시간 공연되었지만, 올해만큼 인기를 누렸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지금 <시카고>의 인기는 대단하다.
"오늘 여러분은 살인과 탐욕, 부패, 폭력, 사기, 간통, 그리고 배신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감상하시게 될 겁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것들이죠."
이렇게 시작되는 뮤지컬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 시카고의 쿡 카운티 교도소를 주요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살인을 저지르고 들어온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는 돈만 주면 사건을 해결해 주는 변호사 '빌리 플린'과 함께 재판을 준비하고, 빌리 플린이 각색한 '사건의 전말'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죄수들이 더 큰 욕망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는 위트와 풍자, 그리고 찐득한 재즈 음악으로 가득하다. 무대 위 밴드의 재즈 연주에 맞춰 배우들은 한편의 관능적인 쇼를 펼친다. 한국 초연 당시 '록시 하트'를 연기하고, 이후부터 '벨마 켈리'를 쭉 연기한 최정원이 다시 한번 같은 배역을 맡았고, 윤공주와 정선아가 힘을 보탠다. '벨마 켈리' 역에는 아이비, 티파니 영, 민경아가 캐스팅되었으며, '빌리 플린' 역에는 박건형, 최재림이 캐스팅되었다. <시카고>는 오는 9월 29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관능적인 쇼, 뒤따르는 경고
자기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하곤 그들을 살해한 벨마는 변호사 빌리 덕분에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건 물론, 기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빌리는 의뢰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각색하고, 때에 따라서는 의뢰인의 삶 전체를 새롭게 꾸며내고, 이를 토대로 '언론 플레이'를 능숙하게 해낸다. 그에게 진실은 그닥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의뢰인이 자신을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5000달러가 있는지다.
빌리는 벨마에 이어 록시의 변호를 맡게 되는데, 빌리는 록시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두려움에 떨던 여인의 정당방위로 둔갑시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빌리는 록시의 가정 환경과 성장 배경을 지어내며 이목을 끈다. 어느새 기자들의 관심은 벨마에게서 록시에게로 옮겨간다.
록시는 자신에게로 향한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해 출소 뒤 스타가 되기를 꿈꾸지만, 록시의 운명은 벨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간의 관심이 벨마에게서 록시로 옮겨간 것처럼, 록시를 향했던 관심도 어느새 다른 죄수에게 향한다.
▲ 뮤지컬 <시카고> 공연사진 |
ⓒ 신시컴퍼니 |
매혹적인 의상과 위트가 무대 위에서 남발되며 불편한 진실을 약간은 포장하고, 관객은 웃음과 박수를 터뜨린다. 이쯤에서 관객은 과연 자신이 제삼자처럼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고, 부조리함과 어이없음에 웃음을 터뜨려도 되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관객도 <시카고>가 펼치는 부조리한 쇼에 열광하고, 진짜는 안중에도 없는 빌리의 변론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관객은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1920년대의 시카고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작품 속 문제가 되는 언론이 이런 사람들 없이 동떨어져 존재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뮤지컬이 막바지로 향할 때, 가끔 등장하던 리포터 메리 선샤인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빌리는 객석을 향해 메리 선샤인의 가발을 벗긴다. 남자가 여자를 연기했다는 사실에 관객들은 놀라고, 빌리는 그런 관객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한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필자는 빌리의 경고를 '너희들도 똑같잖아'하는 비웃음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환호와 웃음 뒤에 찝찝함이 남는 이유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관객들 가운데 '그래도 내가 1920년대의 시카고 사람들보다는 낫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일단 필자는 아니다. 스스로가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란 걸,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튜브 쇼츠를 넘기는 필자 자신을 보고 다시 한번 느꼈다.
<시카고>가 더 이야기하는 것들
<시카고>는 작품 중심을 관통하는 굵직한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부에 흐르는 작은 이야기들도 관심을 두고 봐야 할 이유가 있다. 교도소의 간수 '마마 모튼'은 자신에게 잘하는 죄수들에 한해 편의를 봐주는 인물이다. 변호사를 소개해 주고, 출소 후 죄수들의 삶에 필요한 인물을 알선해 주기도 한다.
마마는 록시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이 벨마의 침대도 정리해 준다고 말한다. 물론 자신이 직접 하는 건 아니고 다른 죄수를 시킨다는 말을 덧붙인다. 자신에게 5달러를 주면 자신이 그중 1달러를 다른 죄수에게 떼어주며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짧게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가 어느 곳에서든 나타난다는 걸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 뮤지컬 <시카고> 공연사진 |
ⓒ 신시컴퍼니 |
하지만 카탈린만큼은 그러지 못한다.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Uh, uh"라는 말과 "무죄"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그녀가 실제로 살인했는지는 상상의 영역이다. 웃으며 살인을 고백하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억울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카탈린을 보고 있자면 누명을 쓴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카탈린은 재판에서도 "무죄"라는 말만을 서툰 말씨로 반복한다. 그리고 끝내, 교수형에 처해진다. 전례가 깨진 것이다. 범죄를 희화화했던 다른 죄수들은 멀쩡한데, 가장 억울해하고 가장 의기소침해 있던 죄수는 교수형을 당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이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카탈린은 비단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뿐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는 듯했다. 목소리를 내도 그 소리가 중심에 가닿지 않는 사람들의 결말을 <시카고> 속 카탈린이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필자와 관객들이 벨마와 록시의 쇼, 빌리의 화려한 언변을 향한 관심을 조금 거두어 카탈린에게 두었으면 좋겠다고. 새롭고 짜릿한 이슈를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것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진다고.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잘 안된다. 실천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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