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선수 악수 거부한 우크라 검객…"조국에 바친다" 메달 따고 오열

배영은 2024. 7. 3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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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국민 검객' 올하 하를란(34)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피스트 위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하다 이내 우크라이나 국기가 새겨진 마스크를 벗어 입을 맞췄다. 그가 30일(한국시간)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한국의 최세빈(전남도청)을 15-14로 꺾고 동메달을 따낸 순간이었다.

올하 하를란이 30일(한국시간)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피스트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올하 하를란이 30일(한국시간)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피스트에 무릎을 꿇고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를란의 동메달은 단순한 '세계 3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침공한 이후 처음으로 치른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따낸 메달이다. 극적으로 마지막 15번째 점수를 올린 하를란이 눈물을 터트리자 현장에 있던 우크라이나 취재진도 함께 울었다. 그랑팔레 중앙홀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은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함성으로 응원을 보냈다.

우크라이나는 2년 5개월째 러시아와 전쟁 중이다. 이번 올림픽에 역대 가장 작은 규모의 선수단 140명을 파견했다. 500명에 육박하는 선수가 고국을 떠나거나 전쟁터에서 사망했고, 훈련 시설마저 파괴돼 어렵게 선수단을 꾸렸다.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머무는 파리의 숙소엔 자국 어린이들이 보내온 그림과 함께 '강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노력한다', '우크라이나 군대에 영광을'과 같은 메시지가 걸려 있다. 하를란은 "그 그림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이 솟는다"고 했다.

올하 하를란이 30일(한국시간)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감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를란은 이미 여러 차례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세계 정상급 검객이다. 2008년 베이징 대회 단체전 금메달, 2012년 런던 대회 개인전 동메달,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단체전 은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런데도 하마터면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 할 뻔했다.

하를란은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개인전 64강에서 러시아 출신 선수인 안나 스미르노바를 15-7로 꺾었다. 국제펜싱연맹(FIE) 규정엔 '결과가 나오면 두 선수가 악수로 경기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명시돼있다. 하를란은 그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검을 내밀며 스미르노바와 거리를 둔 뒤 악수를 거부하고 그대로 경기장을 벗어났다. 스미르노바는 텅 빈 피스트에 50분간 의자를 놓고 앉아 항의의 뜻을 표현했다. 하를란은 결국 실격 처리돼 32강전에 나서지 못했다.

올림픽 펜싱 출전권은 세계랭킹을 바탕으로 배분된다. 세계선수권은 랭킹 포인트가 가장 많이 걸린 대회다.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예견된 실격을 감수한 하를란에게 전 세계 스포츠팬의 지지와 응원이 쏟아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즉각 해법을 마련했다. 하를란에게 토마스 바흐 위원장 명의의 서한을 보내 "당신의 특수 상황을 고려해 남은 기간 파리올림픽 출전 자격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추가 쿼터를 할당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FIE도 개인전에서 실격한 하를란이 단체전에 문제없이 출전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하를란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파리에 왔고, 우크라이나에 전쟁 이후 첫 메달을 안겼다.

올하 하를란이 30일(한국시간) 2024 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메달에 입을 맞추며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를란은 경기 후 "조국이 전쟁 중인 가운데 올림픽에 출전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이 메달은 정말 특별하고, 사실상 금메달과도 같다"라며 "조국을 위한 메달이고,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메달이다. 파리에 오지 못한 선수들, 러시아에 의해 죽은 선수들을 위한 메달"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를란은 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함께 온 선수 모두 한마음으로 고생하고 있다"며 "이 메달이 조국에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우크라이나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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