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면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덜 큰 어른입니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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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한 기자]
며칠 전, 한밤중 길을 가다 심하게 넘어졌다.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나뒹굴면서 바닥과 만났던 대부분의 신체 부위가 멍들고 까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오려는 비명은 쓰~읍하며 집어 삼켜졌고 널브러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 어쩐지 재빠르게 세워졌다. 그리고 온 신경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지 않았을까?'
▲ 길 가다 넘어졌다.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다가왔다. |
ⓒ 남희한(Adobe AI) |
으레 그렇듯 이런 바람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역시나. 10미터 뒤에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지 극심했던 고통이 순식간에 잦아들더니 몸이 알 수 없는 행동을 시작했다.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 손이었는데, 그 손으로 신발에 뭍은 먼지를 털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움을 넘어 기적(?)을 행하고 말았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나는 긴장한 상태로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신발과 바지를 털었다. '전 괜찮아요. 신발이 피해가 제일 커요~'라고 어필이라도 하는 듯 열심히. 손을 희생해서 구해놨던 얼굴이 염치도 없이 더 화끈거렸다.
목격자가 지나가고 어색함을 수습한 나는 그제야 몸을 제대로 살폈다. 예상대로 피해가 상당했다. 오랜만에 만난 바닥과 '하이파이브' 한 손바닥은 심하게 파이고 쓸렸으며, 무슨 원한이 있는지 바닥과 육탄전을 벌였던 어깨와 무릎은 불에 덴 것 마냥 뜨거웠다. 얼음판에 넘어진 여성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는 신화를 제법 유사하게 재연했지만, 뿌듯함 대신 찌뿌둥함이 밀려왔다.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픔을 느끼며 목격자와 거리를 두고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 분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난생 처음 런웨이를 걷는 일반인처럼 걸음이 너무 딱딱하게 똑발랐다. 보통 팔을 앞뒤로 흔들지 않나? 주머니에 있지도 않은 손이 몸에 딱 붙어 있었다. 지나치게 앞만 보며 걷는 듯한 모습. 고개도 동작 그만이다. 확신이 섰다. 이 사람 분명 나를 의식하고 있다.
남을 의식한다는 것이 저리도 어색한 것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가 어느 오피스텔 건물로 빨려들 듯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여전히 남의 시선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어색한 나를 마주했다. 마흔이면 제법 자란 줄 알았는데, 아직 다 크지 못했구나. 넘어질 때 흙이 들어갔는지 입이 좀 텁텁했다.
지나치는 편의점의 유리로 내 모습이 비췄다. 온 몸에 먼지를 묻히고 서있는 꼴이 제법 사나웠다. 멀쩡한 척했던, 누가 봐도 멀쩡하지 않은 내가 거기 있었다. 실소가 새어 나왔다. 늦은 밤 인적 드문 거리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편의점을 보며 썩소를 짓고 있는 중년의 남자. 혹시 누군가 위협을 느꼈다면,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이젠 초연해진 줄 알았는데
남을 신경 쓰는 삶에서, 그러니까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초연해진 줄 알았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나는 제대로 남 앞에 내던져져 본 적이 없었던 거였다. 극한의 상황에서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고 부정하고 싶은 그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초연하기엔 본연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발견하자 아픈 손이 올라왔다. 아, 여전히 배우지 못한다. 가슴까지 올라온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불쌍한 손.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 먼지를 묻힌 채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입가에 맴돌던 실소가 자꾸만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즐겁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즐거워진다고 했던가. 실소는 실실거림을 지나 어이없게도 웃음으로 번졌고 왠지 모르게 시원해졌다.
▲ 조금은 성장하고 있는 듯하다. |
ⓒ 남희한(Adobe AI) |
살다보면 부지불식간에 날것의 자신과 조우하는 순간이 온다. 현실의 타격감에 오만했던 삶의 태도가 조금은 수그러든다. 애써 감춰왔던 생경한 제 모습을 마주한 순간이, 어떻게든 우겨 넣으려고 애쓰던 삶의 틀을 조금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특히 어른이라는 틀이 조금 말랑해졌는데, 7살 막내에게도 가끔씩 삐친다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에 조금은 덜 부끄러워졌다. '아직' 소심한 구석이 있는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한다.
여전히 남의 이목이 신경 쓰이는 나는 그 삐친 마음을 감추려 온화함을 빙자한 억지웃음을 발산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진 않는다. 언젠간 아이와 함께 부모도 커 나갈 것이라 믿고 노력을 다짐할 뿐이다.
초연에 초연하기
양말에 구멍이 났다. 닳아 헤지려고 하는 양말을 마지막이라며 자꾸 신다보니 엄지발가락이 회사구경을 하고 말았다. 보안이 철저한 회사시스템을 이런 식으로 뚫을 줄이야.
예전 같으면 마치 치부라도 드러난 양 급하게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를 신었을 텐데, 그 구멍을 내려다보는 내가 어쩐지 시큰둥했다. 지난번처럼 "어? 구멍 났네..?"하며 은근 큰소리로 말하며 아무것도 아닌 척, 쿨한 척 선수 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욕망. (자료사진) |
ⓒ 픽사베이 |
아무래도 타인의 관심을 바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이중적인 욕망이 조금은 줄어 든 것 같다. 비록 양말을 뚫고 튀어 나온 발가락만큼의 자유로움인 것을 알지만, 뚫린 양말 사이로 느껴지는 시원함만큼 머릿속이 차분해진 느낌이다.
이번 여름, 좋은 발전을 하나 이뤘다. 이제 7살 막내에게 진짜로 대범해질 차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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