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찍기 위해 진주로 향한 감독, 철거 위기 다방의 의미

조영준 2024. 7. 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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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78] 영화 <진주의 진주>

[조영준 기자]

 
 영화 <진주의 진주> 스틸컷
ⓒ 씨네소파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김록경 감독을 떠올리면 역시 영화 <잔칫날>(2020)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날에 팔순잔치 행사의 마이크를 잡아야 했던 무명 MC 경만(하준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장례비용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미뤄두고 타인의 기쁨 앞에서 광대가 되어야 했던 작품 속 한 남자의 모습이 놓여있다. 그렇게 자리를 비운 오빠 대신 장례식장에 홀로 남아 상주 역할을 해야 했던 경미(소주연 분) 또한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그 잔상은 다른 관객에게도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만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영화 <진주의 진주>는 김록경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극 중 영화감독인 진주(이지현 분)가 자신이 작품을 촬영하기 위한 장소를 찾기 위해 경남 진주시를 찾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오래된 공간이 가진 문화적 가치와 낭만'에 대해 그려내고자 한다. 이제 곧 철거를 앞둔 '삼각지 다방'과 이를 지켜내기 위한 지역 예술가들의 모습이 여기에 해당된다.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삼았던 첫 장편 <잔칫날>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 진주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자신이 직접 머물렀던 공간과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부분에서 연결성이 있다. 그는 실제로 진주에서 영화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02.
영화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진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작품을 촬영하기로 했던 카페가 철거되며 당장 다음 주로 예정된 크랭크인이 무산될 위기다. 그런 그녀에게 가까운 선배 훈(허웅 분)은 지방의 새로운 도시 진주를 제안한다. 좋은 시나리오를 쓰고도 장소를 찾지 못해 촬영이 무산되는 것이 아쉬워서다. 예산도 빠듯하고 일정도 수정해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선배의 지인인 주환(문선용 분)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진주에게도 영화를 찍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녀가 찾고자 하는 공간은 정확하다. 그냥 옛날 식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옛날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도 아닌, 정말 그냥 오래된 카페. 하지만 진주의 곳곳을 돌아다녀도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한다. 심지어 안내를 해주던 주환마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뜨면서 진주는 처음 와보는 도시에 혼자 던져지게 된다. '삼각지 다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때다. 오래된 시장 한 편의 낡은 다방,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공간 곳곳에 오래된 물건이 놓여 있고, 지나간 옛 공연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주인인 오 사장(오치운 분)은 이곳 역시 내일모레 철거를 앞두고 있어 촬영은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작품에서 진주가 연달아 마주하게 되는 두 번의 철거는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간의 상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장면과도 같다. 쉽게 사라지고 잊히는 이 시대의 공간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첫 장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카페라는 공간은 개인과 연결되고, 진주 삼가지 다방은 지역과 집단과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없을 첫 장면의 카페가 진주의 영화 촬영뿐만이 아닌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녹아 있는 곳으로 설정한다. 또, 철거를 앞둔 삼가지 다방은 지역 예술가들, 특히 지역 극단 남강의 연출가인 준용(임호준 분)을 비롯한 단원들의 지나온 시간과 결합한다.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현재만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영화 <진주의 진주> 스틸컷
ⓒ 씨네소파
03.
"문화적 가치, 삼각지 다방이 그런 곳입니다."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교류의 장소이며, 지역 시민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었던 삼각지 다방의 철거 소식은 준용과 극단의 단원들에게도 큰 충격이 된다. 20년이 넘게 매일같이 그곳을 오가며 추억을 쌓았고, 심지어 지금은 공간의 이야기를 극으로 완성해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들이 다방의 철거에 반대하며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는 이유다. 준용은 진주에게도 힘을 합쳐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들은 공간을 지켜내고 진주는 계획하고 있는 영화를 무사히 촬영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행동하게 된다. 지역의 문화재단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공간의 보존 가치에 대해 열을 올리고, 사람들 앞에서 현수막을 들고 노래를 부른다.

사실 준용에게는 9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내쫓기듯 공간 하나를 잃어야 했던 경험이 있다. 단원들과 처음으로 함께 극단을 시작했던 무대였다. 그때 손을 내밀었던 게 지금 삼각지 다방의 주인인 오 사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대로 멋이 있다며 마음을 달래줬다. 그런 오 사장이 지금 오랜 추억이 깃든 공간을 없애겠다고 하니 준용에게는 더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벌써 10년에 가까운 세월. 서로의 사정을 모를 리도 없는데 당장 이번 주말에 철거를 하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해오는 태도에 배신감마저 든다. 공간의 문화적 가치를 내세운 마음 이면에 그런 인간적인 섭섭함이 있다.
 
 영화 <진주의 진주> 스틸컷
ⓒ 씨네소파
04.
여기에서 김록경 감독의 전작인 <잔칫날>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이 작품에서 양면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여준 뒤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들 사이의 화해를 중재하는 식의 전개를 시도했던 바 있다. 경만에게는 장례와 잔치가, 경미에게는 장례의 감정적 슬픔과 현실의 선택이 놓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물론 갈등은 봉합되고 안도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매듭지어진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도 유사한 플롯의 진행이 확인되고 있어서다. 이번에 중심이 되는 것은 삼각지 다방이라는 공간이고 이 장소를 둘러싼 첨예한 입장 차이가 양쪽에 놓인다. 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쪽의 이야기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다방의 소유주에 해당하는 오 사장과 주환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다방은 이제 장사가 되지 않고, 예술한다는 이들은 매일 같이 몰려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있는다.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담배를 태우는 것도 그렇다. 두 사람이 보기에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자신들의 놀이터였던 것 같다. 오래된 게 좋다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은 결코 아니고,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주인뿐이라는 것이다.

05.
"다시 만들 수도 없는 거면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나의 공간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는 양측 사이에서 진주는 일종의 성장을 이뤄내는 인물이다. 처음의 카페를 시작으로 '공간의 상실'을 연이어 경험하게 되는 그는 다른 중요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무엇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진주시의 오래된 다방을 지켜내기 위해 영화 촬영도 포기하겠다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그저 오래된 추억과 많은 이들의 기억이 묻은 공간이 보존되고 남겨졌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이다.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 장소와의 이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명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준용을 만나 단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을 때 진주가 짓던 표정을 떠올리면, 짧은 시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처음의 그녀는 공간의 상실이라는 현상에 대한 아쉬움에는 공감하지만 지역 예술인들이 교류하는 슬픔의 감정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눈물까지 흘리는 단원들의 모습 앞에서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시간의 부재다. 그녀 역시 울었던 적이 있다. 첫 장면에서다. 그녀가 카페가 철거당하는 모습 앞에서 슬퍼했던 것은 그 공간을 향유하고 경험한 시간이 지금 경험이 되어 쌓였기 때문이다. 아직 삼각지 다방에는 그렇지 않다. 후반부에서 자신의 영화 촬영까지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그녀 역시 이 공간에 감정을 담을 수 있게 되고, 상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영화 <진주의 진주> 스틸컷
ⓒ 씨네소파
06.
전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김록경 감독은 어느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양측이 강하게 대립하는 장면을 관조하는 태도로 마주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삼각지 다방의 네온사인을 다시 켜는 것 역시 감독이 아닌 극 중 인물이 된다. 공간을 지켜내는 것 또한 오래된 기억이나 상념이 아니라 지금 행동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그들 모두는 자신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다방을 놀이터처럼 여기며 누구보다 두터운 기억을 쌓아왔을 주환 역시 마찬가지다. 불이 다시 켜진 다방은 화해와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이를 통해 감독은 관객들이 작은 희망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주선한다.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한 과정은 지난하다. 쉽게 사라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영화 <진주의 진주>가 오래된 공간의 문화적 가치와 지금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반가운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나 역시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장소가 앞으로도 더 오래 간직되고 지켜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도 함께 웃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바라게 되는 것은 하나 뿐이다. 언젠가 진주가 다시 돌아왔을 때 삼각지 다방이 온기로 가득하게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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