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화장실 청소부가 보여준 품위 있는 삶
[안치용 기자]
*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코모레비(こもれび)'
영화 <퍼펙트 데이즈> 쿠키 영상 속 문구다. 쿠키치고도 짧은 이 영상은 사전처럼 용어를 설명해주는 형식이다. 일본어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란 뜻이다. 비가 쉬어가는 일요일, 한강 고수부지를 걸으며 능소화를, 잠자리를, 여름 하늘을 보다가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떠올렸다. 시사회를 놓치고 개봉한 지 모르고 있다가 미국의 팝가수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어린 날 들었을 연배의 여성들에게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냐"는 힐난을 듣고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의 인생이 바뀌는 영화?
영화는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등의 명작으로 칸·베를린·베니스 세계 3대 국제영화제를 석권한 빔 벤더스 감독의 2023년 작이다. 이 영화는 제76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제96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벤더스의 노익장을 과시한 신작이다.
▲ 퍼펙트 데이즈 |
ⓒ 티캐스트 |
줄거리는 단순하다. 매일 거의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이야기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하고 분재에 물을 주고 나서 직접 차를 몰아 출근한다. 출근에 앞서 집 앞의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내린다. 운전하는 동안 커피를 마시고 카세트테이프로 'Perfect Day' 같은 오래된 팝송을 듣는다. 영화 제목 <퍼펙트 데이즈>는 이 곡에서 왔다. 실제로 팝송이 노래한 내용과 영화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출근해서 청소하는데, 정말 열심히 한다. 점심 식사는 도쿄의 어느 신사를 찾아서 친구 나무 앞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걸 먹고, 그사이에 낡은 필름 카메라로 친구 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는다. 퇴근 후엔 자전거를 타고 공중목욕탕에 갔다가 단골 식당에서 한 잔 술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잠자리에선 소설을 읽고 졸리면 읽은 데까지 표시하고 스르륵 잠에 돌입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상당 시간을 반복된 일상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히라야마의 모습을 잡는가 하면, 위치를 바꿔 히라야마의 시선이 된다. 사이가 소원한 여동생의 딸, 즉 조카가 가출해 히라야마를 찾아오며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기지만, 흐름은 쭉 그대로다.
조카의 방문이 그의 수도사 같은 일상을 오히려 확실하게 검증하는 구실을 하는 듯하다. 이밖에 대단한 영화에선 감이 못 되는 소소한 변화가 히라야마를 찾아오지만, 그의 단호하게 잔잔한 일상을 흔들지는 못한다. 여동생이 찾아와 조카를 데려가며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싱겁게 영화가 끝난다. 너무 간단한 내용이어서 스포 같은 걸 하려고 해도 할 게 없다. 이미 영화의 핵심 줄거리를 숨김없이 다 썼다. 그럼에도 줄거리만으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는 없다. 직접 보지 않고는 이 영화에 왜 극찬이 쏟아졌는지 감을 잡기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벅찬 감동으로 내 마음을 활짝 열어준 이 영화에 감사한다." (휴 잭맨)
"인생의 기쁨은 사소해 보이는 행동 하나에서도,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영화" (윌렘 대포)
▲ 퍼펙트 데이즈 |
ⓒ 티캐스트 |
왜 미리 몰랐을까
<논어>는 '학이편'으로 시작하는데, 다음 구절이다.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 有朋(유붕) 自遠方來(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 人不知不溫(인부지불온)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
해석하면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란 뜻이다. <논어집주>에서는 "이편은 이 책의 머리 편이 된다. 그러므로 기록한 내용이 근본을 힘쓰는 뜻이 많으니, 바로 도에 들어가는 문이요 덕을 쌓는 터전이니, 배우는 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此는 爲書之首篇이라 故로 所記多務本之意하니 乃入道之門이요 積德之基니 學者之先務也라)"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퍼펙트 데이즈>는 이 가운데 '인부지불온'을 다루었다.
극 중에서 히라야마의 여동생이 "정말로 화장실 청소를 하냐"고 묻고, 같이 청소부로 일하는 젊은 동료가 왜 그렇게 화장실 청소에 진심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남이 알아주든 말든 최선을 다하는 성정은 동서를 막론하고 선현이 강조한 삶의 지혜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또 왕년에 한가락 한 사람일수록 대체로 남이 알아주지 않는 걸 못 견뎌 한다. 이러한 심리는 남이 알아주는 것에만 삶의 기준을 두고 자신이 스스로를 알아주는 잣대는 상실했기 때문에 생긴다.
극 중 히라야마의 모습은, 남이 아닌 내가 나의 삶을 인정하는 인생관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평범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내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이 태도야말로 쉽지 않지만, 가장 안정적이고 고양된 삶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남의 인정과 타인의 의미 부여는 바람처럼 유동적이고 한때의 매미울음처럼 덧없기 때문이다.
▲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
ⓒ 티캐스트 |
벤더스의 경륜을 반영하듯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 단지 공자님 말씀을 영화화하는 데 그쳤다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과감한 생략과 농후한 함축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개연성을 포기했지만 오랜 친구 사이의 대화인 양 관객은 감독의 전언을 이심전심으로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영화 자체가 전체로 하나의 '코모레비'이기 때문일까.
위로와 각성을 주는 영화임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는 우리를 맞는 건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고단한 인생이다. 공자가 '인부지불온'을 강조한 것은 그조차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타인의 시선과 무관하게 내가 나를 인정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보라는 권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코모레비' 이상의 힘이 될 것 같다. 연기하기 어려웠을 엔딩의 히라야마 모습이 전하는 바다.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옛 팝송이 귀를 즐겁게 한다. 루 리드의 'Perfect Day',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밴 모리슨의 'Brown Eyed Girl',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 등 영상과 어우러진 팝 명곡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힐링을 느끼지 않을까.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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