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돌아온 세기말 록스타, 일산을 뒤흔들다

이현파 2024. 7.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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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해브 어 나이스 트립 2024'에 트래비스 내한, 30여 년 차 밴드 내공 선보여

[이현파 기자]

 2024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을 통해 8년만의 내한 공연을 펼친 밴드 트래비스(Travis)
ⓒ 이현파
지난 27~28일, 한국의 대중음악 마니아들의 관심은 일제히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 쏠렸다. 실내 뮤직 페스티벌인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이 이틀간 열렸기 때문이다. 민트페이퍼가 주최한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은 여행을 콘셉트로 삼은 뮤직 페스티벌이다. 고온다습의 계절이지만 시원한 실내 홀에서 공연과 맥주,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은 음악성을 인정받은 다국적의 뮤지션이 포함된 라인업으로도 주목받았다. 2010년대 아방가르드한 인디 록의 대표 주자인 킹 크룰(King Krule), 슈게이징 음악과 파워 팝 음악의 감성을 결합한 캐나다의 인디 밴드 올웨이즈(Alvvays) 등이 이 페스티벌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헨리 무디(Henry Moodie) 등 틱톡을 통해 이름을 알린 팝 뮤지션 역시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두 번째 정규 앨범 < Lahai >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뮤지션 삼파(Sampha)의 공연 역시 음악 마니아들에게 일제히 극찬을 받았다. 삼파는 알앤비와 일렉트로니카, 아프리카 전통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법을 넘나드는 아티스트다. 정교한 드럼 비트로 무장한 그의 공연은 보는 이의 예상을 끊임없이 넘어섰다. 권진아, 적재, 키스 오브 라이프, 너드커넥션 등 국내 팬들에게 친숙한 뮤지션도 여럿 출연했지만, 해외 라인업 구성에서는 도전 정신이 느껴졌다.

8년 만에 돌아온 세기말 록스타

2010년대 이후의 뮤지션들이 중심을 이룬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의 라인업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면 록밴드 트래비스(Travis)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트래비스는 1997년에 데뷔해 세기말 영국 록 신을 풍미했던 밴드다. 서정적인 기타 팝을 내세운 트래비스는 콜드플레이(Coldplay), 킨(Keane), 스타세일러(Starsailor) 등과 함께 '포스트 브릿팝'을 대표했다. 트래비스 특유의 애수에 젖은 기타 멜로디는 콜드플레이 킬러스(The Killers) 등 초대형 밴드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트래비스는 2008년 첫 내한 이후 단독 공연과 록 페스티벌로 한국 팬을 자주 만나며 '친한파 밴드'로 자리매김했다. 2016년 이후로는 8년 동안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 사이 트래비스의 멤버들은 모두 50대에 진입했다.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 프란 힐리를 비롯한 멤버들의 머리숱, 깊게 팬 주름에서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이 묻어났다. 오랜만의 한국 방문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프란 힐리는 유독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시간이 참 빠르다. 내 머리 색깔이 이렇게 (주황색으로) 변할 만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7월 27~2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24 해브 어 나이스 트립'
ⓒ 이현파
 
하지만 트래비스는 외적인 모습 외에는 변한 것이 많지 않았다. 프란 힐리는 전성기 시절과 다를 것 없이,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과시했다. 기타를 메고 드럼 위로 올라가 점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관객들에게 저음과 중음, 고음으로 나눠 절묘하게 합창을 유도할 때는 관록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음악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하드록 밴드 못지않게 역동적으로 무대를 이끌어갔다.

'Turn'과 'Sing', 'Writing To Reach You', 'Side' 등의 숱한 명곡이 가진 힘도 여전했다. 다른 악기를 내려놓고 'Flowers In The Window'를 함께 부르는 네 멤버들의 우정, 'Closer'가 연주될 때마다 한국 팬들이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등, 모든 풍경이 예전의 트래비스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연의 감동은 익숙함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성된 지 30년이 넘은, 전성기가 지난 옛날 밴드였지만 과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한편 'Alive', 'Gastlight', 'Raze The Bat' 등 신보 < L.A Times >의 수록곡이 선곡표에 많이 포함되었다. 트래비스는 여전히 좋은 멜로디와 노랫말을 빚는 현재 시제의 밴드였다.

프란 힐리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의 명곡 'Slide Show'를 부르기 전 "밴드는 사라지더라도 음악은 책갈피처럼 남는다"고 말했다. 밴드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팬들의 마음 속에 트래비스의 음악은 변함없는 책갈피로 남아 있다. 트래비스는 90분 동안 팬 저마다의 책갈피 속 추억을 자극했다. 세월의 파도에 침식되지 않은 밴드의 모습은 팬들에게 보상처럼 다가갔다. 나 역시 군대에서 CD 플레이어를 통해 듣던 트래비스의 대표작 < The Man Who >의 감동을 떠올릴 수 있었다.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Is it because I lied when I was seventeen?
"왜 항상 나에게 비가 내리는 걸까? 내가 열일곱 살 때 한 거짓말 때문인 걸까?"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는 단연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였다. '비를 부르는 명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1999년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왜 나에게만 비가 오느냐"며 불운을 토로하는 노래인데, 이 노래를 부르던 도중에 절묘하게 비가 내린 것이다. 트래비스의 공연 중 펼쳐진 놀라운 사건 이후 이 곡은 영국 록을 상징하는 찬가 중 하나로 올라섰다. (그들은 그다음 해 이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맡았다.)

이 곡을 부르던 도중, 프란 힐리는 '트래비스의 공연에 처음 와 보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많은 초심자의 숫자에 놀란 프란 힐리는 '이것이 트래비스 공연의 전통'이라며 친절하게 점프를 권유했다. 그렇게 친절한 록스타와 관객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 25년 전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따라 부르던 팬들의 마음이나, 2024년 일산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팬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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