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2024 파리올림픽 삐딱하게 보기

정승훈 2024. 7. 3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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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훈 논설위원

신선한 개막식 호평 많지만
다른 문화 배려 부족 비판도
신성모독 비판에 결국 "유감"

에어컨 없는 채식 식단 선수촌
'탄소 중립' 표방 의도와 달리
각국 선수 사실상 차별 조장

말하고 싶은 가치 넘쳐나도
스포츠 축제 기본 먼저 지켜야

#1. 강요된 프랑스식 자유와 평등

오스테를리츠 다리를 출발해 센 강을 따라 에펠탑 인근 트로카데로까지 6㎞ 구간에 걸쳐 진행된 파리올림픽 개막식. 노트르담 대성당과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인 모두에 익숙한 명소를 배경으로 사용하면서도 이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선상 개막식을 연출해 냈다. 온몸의 근육이 뻣뻣해지는 희귀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옹이 에펠탑에서 부른 ‘사랑의 찬가’는 백미였다. 그런데 여장을 한 남성 무용수들과 알몸 같은 가수가 꼭 등장했어야만 했나. 다양한 성 정체성에 대한 프랑스판 자유와 평등을 구현한 것이라지만 동의하지 않거나 이런 문화를 금기시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자유와 평등이다”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장 남성(드래그퀸) 공연자들이 ‘최후의 만찬’ 속 예수의 사도로 등장한 장면은 “최후의 만찬을 흉내낸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결국 파리올림픽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는 29일(한국시간) 유감을 표시했다. 남성 가수가 거의 나체로 등장해 노래하는 장면은 일부 국가에서 송출이 중단됐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마저 “개막식의 미적 통일성을 완전히 망친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2. 차별 조장하는 ‘탄소 중립’ 선수촌

조직위는 선수촌 내에 ‘패밀리존’을 설치해 선수들의 자녀를 돌봐준다. 선수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가상현실(VR) 장비를 이용해 심신 안정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는 ‘마인드존’도 설치했다. 진일보한 조치라 할 만하다. 그런데 조직위가 ‘탄소 중립’을 표방한 탓에 선수촌 숙소에는 에어컨이 없고, 선수촌 식당은 채식 위주 메뉴만 제공한다.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셔틀버스에서도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다. 조직위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라 강변했지만 각국 선수단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조치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국가의 선수들은 호텔 등 시원한 숙소를 별도로 잡고 식사도 따로 제공받는다. 하지만 여유가 없는 국가 선수들은 찜통 숙소에서 채식 메뉴로 식사를 하며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 선수촌 숙소가 시원하고 선수촌 식당의 메뉴가 다양하다면 경기력 차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조직위는 각국 선수들의 컨디션 유지보다는 탄소 중립에 앞장서는 프랑스의 이미지가 더 중요한 듯하다. 오랜 시간 이 대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선수들이 조직위가 제공하는 시설 문제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거나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 불리한 여건을 감수해야 하는데도 “그건 각국의 자유 아닌가”라고 강변하는 셈이다.

#3. 환경친화적인데 폭력적인 화장실

공중화장실이 부족하고 그나마도 유료가 많아 노상 방뇨와 악취 문제가 심각한 파리는 2018년부터 남성용 소변기를 도심 길거리에 설치했다. 물을 사용할 필요 없이 톱밥, 목재 등으로 채워진 통에 소변을 모을 수 있어 환경친화적이라는데 모습이 충격적이다.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설계했던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 수준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다. 파리시는 올림픽을 앞두고 이 소변기를 곳곳에 추가 설치했는데 문은 고사하고 칸막이도 없다. 이용하는 사람이나 주변에서 이용자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 모두를 민망하게 만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민망한 수준이 아니라 지극히 폭력적으로 느낄 정도다. 공짜로 이용할 수 있으니 박애 정신의 구현이라고 할 건가, 아니면 유료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지 못한 이들은 용변을 볼 때 이런 정도의 민망함은 감수해도 된다는 건가.

대한민국을 북한이라 칭하고, 선수 이름을 잘못 표시하고, 깃발을 거꾸로 게양하고…. 조직위는 별 것 아니라고 인식할지 모르지만 이런 일들이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가 내세우고, 보여주고 싶은 가치는 넘칠 정도로 많이 담아 소리 높여 떠들고 있는데 정작 올림픽 개최 국가와 도시가 갖춰야 할 기본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프랑스 혁명과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동경을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지니고 살았던 입장에서 지켜보는 2024 파리올림픽의 모습은 말로는 드높은 가치를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데 행동에선 타인을 제대로 배려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 꼰대를 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퍽 씁쓸하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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