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사는 암살자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역사의 또 다른 변곡점, 암살
미국에서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에 대한 암살 또는 암살미수 사건은 수차례 있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역사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1865년의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이 항복한 지 5일 만의 일이었다. 1861년 4월에 시작되어 4년 넘게 계속된 남북전쟁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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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전쟁 종전 앞두고 링컨은 남부의 상처 치유하는 방안 고민
링컨 죽음으로 공화당 강경파 득세, KKK단 조직 등 후폭풍 커
케네디 암살 배후 미궁에 빠졌지만 케네디의 정책 막지는 못해
대통령직 승계한 존슨, 흑인차별법 철폐·베트남전 적극 개입
」
남북전쟁 끝나자 발생한 링컨의 암살
링컨의 암살은 전후 연방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를 통합해야 하는 국가 재건의 시점에서 발생했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미국 건국의 정신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었지만, 폐허가 된 남부를 보듬고 통합해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80년이 지난 1930년대까지도 남부의 문명을 그리워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소설과 영화로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통합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링컨을 암살한 사람들은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국무장관을 모두 암살하려 했다. 이를 통해 공화당과 북부의 남북전쟁 승리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두 건의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고, 대통령만 암살되었다. 연극배우 출신인 암살자는 링컨에게 총알을 발사하는 순간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외쳤다.
암살자들은 링컨의 죽음으로 전쟁 결과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오히려 링컨의 암살로 인해 남북전쟁 이후의 재건 과정은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링컨은 전쟁 중이었던 1863년부터 전후 남부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1864년의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를 민주당 출신으로 지명한 것도 득표에 대한 고민과 함께 전후 통합을 위한 방안이었다.
링컨의 암살이 가져온 역효과
링컨은 전후 공화당의 강경파보다는 온건파 입장에서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다. 노예해방을 밀어붙였던 강경파가 득세할 경우 연방의 깃발 아래 남부의 통합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암살은 공화당 강경파의 득세를 가져왔고, 1865년의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링컨의 죽음이 가져온 공화당 강경파의 득세는 역설적으로 전후 남부와 민주당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다. 전쟁 결과 민권법이 제정되었고, 수정헌법 14조와 15조를 통해 흑인들의 인권과 참정권을 보장하게 되었지만, 테네시주에서 흑인을 테러하는 KKK단이 조직되었고, 전후 10년이 지나면서 짐 크로우법(Jim Crow Laws)이라는 흑인차별법이 제정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주도한 남북전쟁으로 미국이라는 연방이 분리되지 않았고,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는 게티스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암살로 인종 차별의 법적 해결은 100년이나 미루어졌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미국을 뒤흔드는 두 번째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100년 후 케네디의 당선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는 링컨 당선 후 100년이 되는 1960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젊고 진보적인 미국을 내세웠던 케네디는 부통령 출신의 공화당 닉슨 후보를 눌렀다. 미국 사회가 1950년대의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변화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대통령은 정권을 운영하기에 많은 약점을 갖고 있었다. 젊은 나이와 길지 않은 정치적 연륜 때문에 정치권 내에 지지세력이 탄탄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미 동북부의 작은 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이 약했고, 인종적·종교적으로 소수였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직후 대외정책에서도 약점을 드러냈다. 피그만 침공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피그만 사건은 원래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추진했던 공작으로, 쿠바 혁명을 실패하도록 하기 위해 쿠바 난민들을 훈련시켜 쿠바를 침공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피그만 침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피그만 사건은 실패하였지만,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베를린을 방문해서 역사적 연설을 했다. “모든 자유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의 시민이므로 저 또한 한 자유인으로서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란 말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이제 냉전 시대 자유민주주의 지도자의 상징이 되었다.
누가 케네디를 암살했는가
이렇게 위태로워 보이던 케네디 정부는 결국 1963년 11월 케네디의 암살로 막을 내렸다. 붙잡혔던 암살범이 조사도 받기 전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암살의 이유가 영원히 묻혀 버렸지만, 케네디의 정치적 특징을 보면 공산주의자나 기득권 정보기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암살의 배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암살이 그의 정책을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했던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보다 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존슨 대통령은 남부 텍사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보다 넓은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통과시키지 못했던 민권법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짐 크로우법이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링컨 암살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흑인의 선거참여를 보장하는 선거권법을 통과시켰다.
존슨의 대통령직 승계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하지 않았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후에 존슨 대통령은 국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제2의 매카시즘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케네디의 암살범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공산주의자였다면, 그의 목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케네디의 후계자는 베트남에 대한 더 적극적 개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만약 보수적 기득권자였다면, 그의 목표는 더더욱 실패한 것이었다. 후계자인 존슨은 100년 만에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한 역사적 대통령이 되었다.
10·26 사건과 유신체제의 종언
한국에서도 어쩌면 10·26 사건이 암살의 또 다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암살자는 분명하고, 그 암살로 인한 결과 역시 명확하다. 암살로 인해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6 사건을 일으킨 암살자의 의도,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암살자의 의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단순한 정권 탈취를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암살은 성공했지만, 정권 탈취에 실패했다. 다른 하나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위한 암살이었다는 것이다.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민주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두 주장이 있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목적은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에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들이 적지 않다. 주로 혁명이나 전쟁이 큰 변곡점이 되곤 한다. 위화도 회군이나 5·16 군사정변같이 지배층 내부에서의 정변도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계기는 암살이다. 지도자를 죽임으로써 역사적 흐름을 바꾸고자 한 시도였다.
암살,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해
세계사 전체를 놓고 보편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겠지만, 미국에서 있었던 두 사건,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놓고 본다면, 암살이 단기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살자의 의도대로 역사의 흐름이 변화되지는 않았다.
일정한 변화를 끌어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한 역효과가 오히려 컸던 것은 아니었을까? 1884년의 갑신정변 과정에서의 암살이 개화파들에게 가져왔던 역효과도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다. 역사의 흐름을 억지로 되돌리려고 했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살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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