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두메에서 받은 값없는 선물
두메의 바람은 달았다. 옛날 같으면 화전민이나 살았을 법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골짜기. 몇 년 전 직장에서 은퇴한 후 낙향해 은자(隱者)처럼 살아가는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다디단 꽃향기가 물씬거렸다. 나는 여름 휴가를 인파가 붐비는 명승지로 향하는 대신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로 하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의 집에 도착하는 즉시 먼저 짐을 풀었다.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자발적 가난을 택해 살아가는 벗의 알뜰살뜰한 살림살이를 돌아본 후 그가 입만 열면 자랑하던 계곡 깊은 곳에 있는 저수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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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승지 대신 친구집 택해 하룻밤
솔바람 소리, 물새 지저귐 들으며
귀를 씻고 흐트러진 마음 다잡아
」
야산 기슭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크고 둥근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소나무에 둘러싸인 저수지는 최근에 내린 많은 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저수지의 물은 맑고 짙푸르렀다. 물가엔 낚시꾼 몇이 한가로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잔잔한 물속에 비친 푸른 소나무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물 위를 날아다니는 백로의 날갯짓에 취해 방죽을 걷던 우리는 큰길을 벗어나 솔숲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느릿느릿 오솔길을 걸어 조금 올라가니 길옆에 오래된 무덤 하나가 우뚝 돋을새김 돼 있었다.
무덤 옆에는 텐트를 쳐도 넉넉할 만한 평평하고 너른 바위가 있었다. 친구는 그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좀 쉬어 가자고. 기가 막힌 명당이야.” 벗의 말처럼 세상에 이런 명당이 없었다.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크고 둥근 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물가에는 군락을 이룬 수양버들이 푸른 나뭇가지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버들 잎사귀들은 능라비단 같은 물결과 어우러져 야릇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뛰어난 풍광을 숨겨두고 혼자 즐겼단 말이지?” “허허! 그런가. 마음이 불편하고 세상살이가 어지러울 땐 가끔 여기 오는데 그냥 이렇게 앉아만 있다가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정말 그랬다. 황홀한 풍광에 반해 입을 닫고 눈과 귀만 열어놓고 있으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온갖 상념들이 달아났다. 괴로운 악몽이라도 꾼 이튿날엔 ‘물의 어머니 무릎에 가만히 기대어보자’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 역시 눈을 감고 물의 문도(聞道)가 됐다.
물의 슬하에 그렇게 앉아 있자니 솔바람 소리, 물새들 지저귀는 소리만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물은 그렇게 바람 소리와 새소리와 꽃향기를 방목하고, 또 자기 발치에 기댄 우리를 방심(放心)에 이르게 해줬다.
얼마 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앉아 있었을까. 벗이 먼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소중한 보물을 두고 가는 것처럼 아쉬웠지만, 나도 눈을 뜨고 일어섰다. 오솔길을 걸어 내려와 저수지 방죽을 걸으며 내가 말했다. “오늘 정말 호강했어. 귀도 잘 씻고 말이야.”
“그래? 자네 말처럼 옛날엔 귀씻이(洗耳) 풍습이 있었지. 조선 시대 영조 임금은 사도 세자를 증오해 세자의 말소리만 들어도 귀를 씻었다고 하지. 물론 영조의 귀씻이는 병적이지만,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으면 귀를 씻는 습속은 유교 사회에 보편화해 있었던 모양이야.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는 한 방편으로 오늘 우리가 새겨볼 만한 습속일 거야.”
누가 역사학자가 아니랄까봐 그는 귀씻이 풍습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평소 까맣게 잊고 지내던 것을 나는 친구를 통해 다시 가슴에 새길 수 있어서 기뻤다. “새삼 일깨워줘서 고맙네. 자네 말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가는 데도 마음이 많이 고요해졌어.”
대자연에는 사랑과 평화라는 진동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고요와 침묵만큼 하느님을 닮은 것이 없다던 누군가의 말도 가슴에 스며들었다. 모처럼 나는 마음의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이런 걸 무상(無償)의 선물이라 하던가.
그 선물을 받아 누리는 이가 누구든지 마음을 비우고 눈과 귀만 열고 있으면 누구에게나 내려주는 선물. 등짐 진 노새처럼 세상의 온갖 근심 걱정을 떠메고 가는 이의 어지럽고 무거운 마음을 가벼움에 이르게 하는 선물. 그리고 고요와 평화를 얻은 후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내려가게 하는 선물!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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