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조사 졌는데, 선관위 "마두로 당선" 발표…혼돈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대선 개표 결과 니콜라스 마두로(62) 대통령이 3연임에 성공한 것으로 29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했다. 2013년 이후 장기 집권 중인 마두로 대통령이 6년 더 임기를 연장하게 됐다.
하지만 야권은 서방의 출구조사 결과와 다른 결과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야권 후보의 승리를 선언하며 불복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고 차베스 이후 25년째 ‘좌파 포퓰리즘’의 수렁에 갇혀 있는 베네수엘라 정국이 다시금 시계 제로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엘비스 아모로소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장은 이날 0시 10분쯤 “80% 가량 개표한 결과 마두로 대통령이 51.2%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다”며 마두로 대통령의 당선을 선포했다. ‘민주야권 연합’ 소속의 야당 지도자 에드문도 곤살레스 우루티아(75) 후보는 44.2%의 득표율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결과가 나오자 마두로는 불법 관권 선거 논란을 겨냥해 베네수엘라의 선거 시스템을 극찬하며 “평화와 안정의 승리”라고 지지자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로써 마두로 대통령의 임기는 2030년까지 18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야권은 개표 결과에 반발하며 "진짜 승자는 우리"라고 선언했다. 우루티아 후보는 “베네수엘라 국민과 전 세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며 개표 조작을 문제삼았다. 선거 기간은 물론 투표 이후에도 우루티아의 승리가 예상됐었기 때문이다.
앞서 복수의 서방 여론조사 기관은 선거 과정에서 줄곧 우루티아가 마두로에 앞서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조사기관 에디슨 리서치가 실시한 출구조사에서도 우루티아가 65%의 예상 득표율로, 마두로(31%)를 2배 넘게 득표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방 언론에선 베네수엘라 정부가 10여년 전 도입한 전자투표 시스템으로 개표를 조작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선 유권자가 투표 기계에서 후보를 선택한 뒤 인쇄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도록 돼 있다. 이런 전자 투표 결과는 선관위에 곧장 전송돼 집계된다.
문제는 선관위가 야당측 인사들이 인쇄된 투표용지를 검증할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 실시간 개표 상황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논란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베네수엘라는 2018년에도 부정선거 의혹으로 국제적인 제재를 받았다.
마두로는 선거 전부터 차갑게 식은 여론과 달리 자신의 재선을 주장했었다. 당초 유력한 야권 후보였던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57)의 피선거권도 박탈했다. 마두로의 측근이 장악한 감사원과 대법원의 결정으로 마차도는 15년간 공직 출마를 금지 당한 상태다. 이 때문에 야권은 급히 외교관 출신인 우루티아로 후보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마두로 정부는 야권 인사들을 구속하고, 야당 지도자들의 유세 현장 주변을 봉쇄하는 등 선거를 계속 방해했다. 일례로 야당 후보에게 장소를 빌려준 호텔이 영업을 정지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게다가 마두로는 투표 전 “내가 대선에서 지면 피바다”라며 민심에 불복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투표 당일에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소속 기자가 이날 후드를 쓴 검은 옷차림의 남성들이 “비바 니콜라스(니콜라스 마두로 만세)”를 외치며 다른 야권 성향 유권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마두로는 전임 독재자 우고 차베스의 사망으로 2013년 집권한 이후, 남미의 대표적인 좌파 포퓰리즘인 ‘차비스모’(차베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제공, 생필품 가격을 통제하는 사회주의를 기조를 강화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결국 물가상승률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뛰어오르고 사회시스템은 붕괴했다.
그결과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 펼쳐졌다. 세계 1위(약3000억 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로 거래가 끊기고 국유화한 생산 설비마저 노후화되면서 연료난에 시달려야 했다. 도심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으려는 긴 줄이 늘어서기 일쑤고, 트랙터 대신 소로 밭을 갈아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경제난으로 지난 10년간 780만명이 해외로 탈출했다는 공식 조사결과도 있다. 약 2900만명으로 추산되는 베네수엘라 전체 인구 가운데 4분의 1이 탈출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이유로 베네수엘라는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쏟아지는 베네수엘라 난민에 미국 남부 국경이 불안정해지자, 미국 공화당은 민주당 행정부가 이민자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고 맹비난 중이다.
난민 행렬은 더 늘어날 조짐이다. 이와 관련, BBC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두로가 당선되면 베네수엘라를 떠나겠다는 응답자가 인구의 10%에 달했다”며 “또 다른 여론조사에선 인구의 3분의 1이 이민을 갈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전했다.
부정 선거 가능성이 제기되자 국제사회의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했고, EU·아르헨티나·칠레·코스타리카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반면 마두로 정권과 가까운 러시아는 “투명하고 신뢰 있는 선거”, 쿠바는 “역사적인 승리”라고 마두로 당선을 지지했다.
앞으로 베네수엘라의 정국은 안개 속이다. 유혈 사태가 벌어지거나, 2018년 대선처럼 야권 인사가 대통령을 칭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엔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지지하면서 한때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은 2명이었다. 하지만 과이도 의장의 친위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두로가 권력을 다시 장악하게 됐다.
대법원에는 우루티아 후보가 속한 정당의 법인격의 합법 여부를 둘러싼 사건이 올라와 있어 또 다른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마두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마두로의 측근인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국방장관은 “선거 관련 모든 자료와 인프라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지점마다 장병을 배치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말을 선거 전에 남겨 이런 의혹을 부추겼다.
박현준 기자 park.hyeon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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