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사고 위험 많은 직업 속이고 보험 계약 체결…'통지의무' 위반 아냐"
'고지의무' 위반 해지 기간 지났다면 해지 못해
사고 위험이 많은 피보험자의 직업을 속이고 보험계약을 체결한 경우 보험사가 상법상 제척기간 내에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있지만, 사고발생 위험이 증가했을 때 적용되는 '통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보험계약 체결 당시부터 보험사고가 발생할 때까지 줄곧 같은 직업에 종사했다면 '사고발생의 위험이 현저하게 변경 또는 증가된 경우'로 볼 수 없는 데다가, 그 같은 해지권을 인정한다면 고지의무를 위반한 보험계약자는 상법상 제척기간이 지난 뒤에도 언제라도 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부당하다는 이유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A씨의 배우자 B씨와 두 자녀 등 3명의 유족이 메리츠화재해상보험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원심은 망인(A씨)과 원고 B씨가 이 사건 각 보험계약 체결 당시 망인의 직업을 보험사고 발생의 위험이 낮은 직업으로 고지해 고지의무를 위반했으나 보험기간 중에 실제 직업이 변경되지는 않았으므로 그 직업이 이 사건 각 보험계약 체결 당시 피고에게 고지된 것과 다르더라도 상법 제652조 1항의 '통지의무' 또는 이와 같은 취지인 이 사건 각 보험약관의 '계약 후 알릴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라며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상법 제652조 및 이 사건 각 보험약관의 통지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메리츠화재의 상고를 기각한 이유를 밝혔다.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했던 A씨와 배우자인 B씨는 메리츠화재와 2009년, 2011년, 2016년 각각 1건씩 모두 3건의 상해사망보험계약을 체결했다. 피보험자인 A씨에게 상해사망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법정상속인인 B씨와 자녀들이 보험수익자로서 보험금을 자급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보험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들 부부는 A씨의 직업을 사실대로 기재하지 않고, 근무처 항목에 '사무원'으로 업종이나 하는 일 항목에 '관리' 내지 '건설', '대표', '행정 및 경영지원 사무직 관리자' 등으로 허위사실을 기재했다.
A씨는 2021년 7월 공사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B씨는 메리츠화재를 상대로 3건의 보험계약에 따른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메리츠화재가 상법 제652조 1항이 규정한 '통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계약을 해지한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자 소송을 냈다.
재판에서는 사고발생 위험이 많은 직업을 감추고 직업을 속여 계약을 체결했을 때 상법 제651조의 '고지의무' 위반에 해당되는 동시에 같은 법 제652조 1항의 '통지의무' 위반에도 해당되는지가 쟁점이 됐다.
상법 제651조(고지의무위반으로 인한 계약해지)는 '보험계약당시에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중요한 사항을 고지하지 아니하거나 부실의 고지를 한 때에는 보험자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내에, 계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3년내에 한하여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두 기간 중에 어느 하나라도 먼저 도과되면 해지권은 소멸된다.
이처럼 상법은 계약을 체결할 때 보험계약자가 중요한 사항을 고지하지 않은 경우 보험사가 계약 체결일로부터 3년 내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1심 재판부는 이번 사안의 경우 A씨와 B씨가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고지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3건의 보험계약 중 마지막 보험계약을 체결한 때로부터 이미 3년이 지난 뒤에 보험사고가 발생해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메리츠화재는 상법 제652조 1항의 통지의무 위반을 해지사유로 들었다.
상법 제652조(위험변경증가의 통지와 계약해지) 1항은 '보험기간 중에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사고발생의 위험이 현저하게 변경 또는 증가된 사실을 안 때에는 지체없이 보험자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이를 해태한 때에는 보험자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내에 한하여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메리츠화재는 "A씨가 보험사에 안내한 직업과 다른 직종에 종사해 보험사고 위험이 커졌음에도 계약 체결 이후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은 상법상 통지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B씨와 자녀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메리츠화재가 B씨에게 9480만원, 두 자녀에게 각각 6320만원씩의 보험금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상법 제652조 1항에서 통지의무 대상으로 규정한 '위험의 변경 또는 증가'는 보험기간 중에 발생한 것으로 한정된다고 보는 게 문언에 충실한 해석"이라며 "보험계약 기간 중 실제 직업이 변경되지 않았다면 보험사에 고지된 직업과 다르더라도 상법상 통지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고지의무와 별개로 위험이 증가했을 때의 고지의무를 규정한 입법취지는 계약 체결 당시와 비교해 상황이 변경됐을 때 그 같은 사실을 통지할 의무를 부과한 것이지, 계약 체결 당시부터 존재했던 위험을 통지할 의무를 중첩적으로 부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약관에 따라 계약을 해지한다는 메리츠화재의 주장에 대해서도 "피고의 주장과 같이 망인이 이 사건 각 보험계약 체결 당시 실제 직업과 달리 고지하고 보험계약 기간 중에 이를 알리지 않을 경우에 보험약관상의 '계약 전 알릴 의무'와 '계약 후 알릴 의무'를 경합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본다면, 보험계약자는 그에 따른 제재도 중복적으로 받게 돼 부당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판부는 "두 의무가 경합적으로 적용된다고 보면 보험자는 기간 제한 없이 해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돼 보험계약자로서는 언제든지 보험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는 불안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라며 "이와 같은 해석은 계약 전 알릴 의무 위반에 대한 해지권을 제한하고 있는 이 사건 각 보험약관의 내용 및 상법 제651조의 입법취지에 반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메리츠화재는 항소했지만 2심 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 역시 이 같은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상법 제651조는 보험계약 당시에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해 중요한 사실을 고지하지 않거나 부실의 고지를 한 때에는 보험자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 내에, 계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3년 내에 한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라며 "상법 제652조 1항은 보험기간 중에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사고발생의 위험이 현저하게 변경 또는 증가된 사실을 안 때에는 지체없이 보험자에게 통지하도록 하면서, 이를 해태한 때에는 보험자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 내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 규정들을 별도로 둬 해지권의 행사기간을 달리 규율하는 취지나 각 규정의 문언 등에 비춰 보면, 상법 제651조의 고지의무는 중요한 사실이 보험계약 성립 시에 존재하는 경우에 발생하고, 상법 제652조의 통지의무는 보험계약 성립 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보험기간 중에 사고발생의 위험이 새롭게 변경 또는 증가된 경우에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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