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했던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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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숙 기자]
관공서에 일을 보러 갔더니 담당자가 민원인들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응대하였다. 오는 말이 좋으니 가는 말도 좋은 건 당연한 이치. 민원인들도 담당 공무원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이란 호칭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두루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또 '학예에 뛰어난 사람을 존칭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에서는 풀이 해놓았다.
선생이란 호칭이 이렇게 하향평준화를 해서 쓰이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이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올려서 부르는 건 국어사전에서 풀이하는 바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 배움을 얻을 만한 사람이 한 사람은 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내게 배움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선생'일 수 있다.
▲ '죽산 조봉암' 평전 |
ⓒ 이승숙 |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추모음악회가 지난 27일(토요일)에 있었다. 그의 고향인 강화군 선원면에서 열린 음악회는 죽산의 서거 65주년을 추모하는 공연이었다. 강화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출연한 추모 음악회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선원사지에서 있었다. 죽산 조봉암이 어린 시절 뛰어놀았을지도 모를 선원사 터에서 추모 음악회를 했으니 저 세상에 계신 죽산도 좋아 하셨을 것 같다.
강화가 낳은 큰 사람인 죽산 조봉암은 1899년에 태어나 1959년까지 산 사람이다. 죽산이 살았던 때는 우리나라의 격변기였다. 죽산은 일제 강점기 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해방이 되자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였다.
강화가 낳은 큰 사람, '죽산 조봉암'
▲ 죽산 조봉암의 외손녀 부부와 추모음악회를 만든 강화군 박흥열의원. |
ⓒ 이승숙 |
그날(7월 27일)은 장마 끝에 잠깐 하늘이 햇빛을 보여 주었다. 기상대에서는 비가 올 거라고 예보를 했지만 죽산을 추모하는 이들의 정성에 감응을 하셨는지 하늘은 종일 맑고 밝았다. 게다가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어서 뜨거운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죽산의 어린 시절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죽산은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십 리도 넘는 길이었다. 그 길을 책 보따리 메고 걸어갔을 죽산을 떠올려 본다. 어린 아이가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길이었지만 공부를 할 수 있어 그 길이 지루하지 않았을 것 같다.
▲ <고향에서 부르는 님의 삶과 음악>, 죽산 조봉암 추모음악회 |
ⓒ 이승숙 |
"소작제도라는 이 수천 년 내려오는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에요. 없애버리자는 것이에요. 이것이 개혁이에요. 개혁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 문자가 결코 무서운 문자가 아니에요. 그런 까닭에 소작제도를 없애고 우리의 봉건적인 사회조직을 근대적 자본주의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올시다." - 죽산의 말 중에서
▲ 강화아버지합창단 |
ⓒ 이승숙 |
▲ 강화레이 우쿠렐레합주단 |
ⓒ 이승숙 |
일제 강점기 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조국이 해방된 뒤에는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헌신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이 된 죽산은 헌법 및 정부조직법을 만드는 기초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법을 입안했는데 그가 기초한 농지개혁법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토지 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으로 법 중의 법이다. 죽산은 제헌의원으로서 헌법을 기초하였을 뿐만 아니라 헌법 정신에 그의 기본 사상을 올곧게 담았다. 헌법 제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외쳤던 사람
개인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공복리 향상은 죽산의 정치 철학이었다. 그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줄기차게 이 개념을 주장했다. 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사항을 헌법으로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본회의에서 밝히기도 했다.
▲ 강화 길상어린이합창단 |
ⓒ 이승숙 |
▲ 강화여성노래패 '어깨동무' |
ⓒ 이승숙 |
농지개혁법을 비롯해서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하는 일을 했으니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농민들의 지지가 높았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점을 살펴보면 죽산의 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을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지와 인기는 정적들에게는 위협적인 요소로 보였으니, 그래서 죽산은 죽임을 당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무력으로 북한을 정복하는 북진통일론은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 반공정책이었다. 그에 반해 죽산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이 평화통일론은 당시에는 국시(國是)를 위반하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국민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죽산은 잘 알고 있었다.
"무력통일론은 다시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는 것 아닙니까? 민족의 생존이 달린 게 전쟁입니다. 전쟁 나면 누가 먼저 죽습니까? 가장 약한 민중들이 먼저 죽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죽산의 말 중에서
▲ 추모시를 낭송하는 '황덕명' 작가 |
ⓒ 이승숙 |
▲ 추모음악회를 관람하는 시민들 |
ⓒ 이승숙 |
"우리가 못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날이 온다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간다네." - 조봉암 선생 옥중 유언 중 -
시대를 만든 사람도 있고 시대를 이끈 사람도 있다. 그 모두가 다 '시대가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 조봉암은 시대를 앞서서 이끈 사람이었다. 2011년 1월 20일, 사형 집행 52년 만에 대법원 전원 합의부는 전원 일치로 죽산의 '무죄'를 선고하였다.
모두가 고루 잘 사는 나라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 비석에는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고 한다. 추모 음악회에서 추모 시를 낭송한 황덕명 작가는 "고르게 잘 사는 하나된 조국"이라는 문구를 그 비석에 새기자고 했다.
오는 7월 31일은 죽산 조봉암이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은 날이다. 그날 죽산이 묻혀있는 망우리 묘소에서 죽산을 기리는 추모식이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지하철 1호선 회기역 2번 출구 앞에서 9시 50분에 셔틀버스가 출발하고, 망우역사공원 관리사무소 앞에서도 10시 30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인천에서는 8시 30분에 인천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셔틀버스가 출발한다고 한다.
강화에서는 오전 8시, 강화수협 앞에서 모여 함께 출발한다고 하니, 나도 가서 죽산이 꿈꿨던 세상을 되새겨 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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