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필리버스터∙野 강행 악순환…그 뒤엔 거야 '당론 법안 45개' 있다
“무제한 토론 4일째 새벽입니다.”
28일 오전 1시, 국회의장석에 서 있던 우원식 국회의장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는 “재석 189인 중 찬성 189인으로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 대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며 의사봉을 세 번 내리쳤다. 반대와 기권은 0표.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법안 처리에 반대하는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강제 종료한 뒤 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순간이다.
‘야당의 초고속 법안 상정→여당의 필리버스터→야당의 강제 중단 및 표결 강행’ 순서로 쟁점법안이 처리된 건 26일 방통위법(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에 이어 두 번째다. 29일엔 방송문화진흥회법, 30일엔 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이 이런 식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이쯤 되면 22대 국회 법안 처리 공식이자, ‘뉴 노멀’이라 할 만하다.
뉴 노멀은 끝이 아닌 시작에 가깝다. 이런 방식으로 거야(巨野)가 처리를 시도할 당론 법안들이 쌓여있다. 민주당은 당장 7월 임시국회에서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과 ‘노란봉투법’도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원내 핵심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8월 1일 본회의에 두 법안을 올릴 것”이라며 “여당이 필리버스터를 해도 7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8월 3일 안에는 통과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22대 국회 개원 두 달여 만에 방송 4법을 포함해 6개 법안이 필리버스터를 강제 중단하고 강행 처리되는 셈이다.
이 같은 거야의 법안 강행 처리는 21대 국회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다. 21대 국회가 필리버스터를 거쳐 입법을 강행한 사례는 4년 통틀어 공수처법ㆍ국정원법ㆍ남북교류협력법ㆍ검찰청법ㆍ형사소송법 개정안 등 5건이었다. 22대 국회는 개원 두 달 만에 이를 넘어선 것이다. 한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어차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거라 이런 식이면 9월 정기국회까지 아무 법도 못 만들 판”이라며 “그냥 국회의 입법 기능을 없애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민주당이 가속 페달을 세게 밟는 배경에는 당론 정치가 있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개원 후 45개 법안을 당론으로 지정한 뒤 줄줄이 밀어붙이고 있다. 여야의 견해차가 큰 쟁점법안일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했거나 처리할 방송4법과 25만원 지원법, 노란봉투법 모두 당론이다.
이런 강짜에 민주당 내에서도 “숙의를 막는다”는 반발이 나온다. 10일 민주당 의원이 모인 비공개 텔레그램 방에서는 “당론을 최소화하라”, “법안별로 논의 시간이 보장됐으면 좋겠다” 같은 반발이 나왔고, 진성준 정책위의장이 “22대 국회 초기인 만큼 양해해달라”며 수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내 지도부는 “21대 국회 때 충분히 논의한 법안” 등의 이유로 일단은 밀어붙이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당론으로 지정된 박상용 검사 탄핵안에 기권표를 행사했던 곽상언 민주당 의원이 당 안팎의 반발에 등 떠밀려 원내부대표에서 물러난 뒤 분위기가 더 얼어붙었다. 국회 관계자는 “본회의 안건 심사를 국회 각 상임위가 아니라 사실상 민주당 의원총회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당은 여당대로 민주당의 폭주를 멈추지 못한 채 무기력증을 호소하고 있다. 시간 끌기만 가능할 뿐, 수적 열세로 인해 결국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없어서다. 한 영남권 의원은 “이런 식으로 법안마다 필리버스터를 하면 365일 내내 하루에 한 건씩 해야 한다”며 피로감을 호소했다. 방송 4법 반대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시간은 첫날 24시간 7분, 둘째 날 30시간 20분이었다.
원내 지도부가 전략 없이 필리버스터에만 매달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 수도권 의원은 “여당 역시 대통령실의 눈치만 보며 협상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4법’ 처리 과정에서 사회권을 거부한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증오의 굿판을 당장 멈춰야 한다. 여야 지도부가 국회의원을 몰아넣고 있는 바보들의 행진을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제는 여야가 기계적으로 반대와 강행을 반복하는 수준”이라며 “강행처리되는 입법 중 민생과 직결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고, 여당도 대안없이 필리버스터에만 매달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교수는 “여야가 오로지 지지층과 정치적 이득만 고려하는 와중에 민생만 희생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보현 기자 kang.bo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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