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칼럼] 배신과 소신 사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헤어지자”는 이영애에게 유지태가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이 변하는 건지, 사람이 변하는 건지 정답 없을 논박은 이어져 온다. #영화 『달콤한 인생』. 자신을 죽이려던 조폭 보스 김영철에게 총을 들고 마주 선 2인자 이병헌이 절규한다. “저 진짜로 죽이려 그랬습니까. 7년 동안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해 온 나를….” 보스는 나지막이 답한다. “넌 내게 모욕감을 주었어.” 자신의 젊은 애인에게 남자가 생기자 ‘처리’하라던 명령을 거역한 부하에게의 복수였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건지 잘 모르겠으니 참 씁쓸한 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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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반과 복수 점철된 정치의 세계
거부된 친윤의 “배신자 한동훈”
‘맹목적 충성’ 대 ‘명분 있는 소신’
분별해 낼 성숙한 정치 전기 되길
」
가장 복잡한 감정이 배신감이다. “사람과의 믿음·의지를 깨트리거나 약속·기대를 어겼을 때” 일어난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됐나”에 자존감이 무너진다. 좌절·우울·분노를 거쳐 복수에 이르기도 한다. “마지막에 불협화음을 낸 교향곡”처럼 종점의 분노는 훨씬 더 길고 좋았을 지나간 기억·행복의 시간을 모두 ‘나쁜 것’으로 뒤바꿔 버린다. 무서운 후유증이다.
모든 게 얽히고설킨 정치의 배신이란 훨씬 잦다. 더 복잡하다. 뛰어난 지도자 메르켈 독일 총리만큼 배신의 구설에 자주 오른 이도 없다. 콜 총리는 데메지에르 동독 총리의 천거로 눈여겨보던 35세 메르켈을 여성청소년장관에 최연소로 임명, 총리로까지 키워준 정치적 대부였다. 메르켈은 그러나 데메지에르가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 부역했던 사건으로 물러날 때 그를 돕지 않았다. “출세에 눈 먼 기회주의자” “인간적 의리에 영향받지 않는” 등의 평가가 엇갈렸다. 콜이 기민당 대표 때 불법 정당 기부금을 받았던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콜은 당에 피해를 입혔다’란 신문 칼럼으로 통렬히 비난한 건 메르켈이다. “당은 자립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콜 없이도 미래를 마주할 자신감을 갖자”는 요지였다. 8년 뒤 콜이 세상을 뜨자 미망인은 메르켈의 장례식 참석조차 반대한다.
‘미국의 배신녀’라던 공화당의 올림피아 스노 메인주 상원의원은 54차례 투표에서 4분의 3을 당론과 다른 선택을 했다. 당원들은 “무늬만 공화당원(RINO·Republican In Name Only)인 배신자”라고 성토했다. 우리 민주당의 ‘수박’이다. 메인주는 그러나 최고 74%의 선거 득표율로 ‘나라를 위한 그의 선택’을 존중,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배신 표결’ 때마다 그는 “역사가 부른다면(When history calls…)”이라며 담대했다. 메르켈과 스노. 배신일까, 소신일까. 정치적 배신을 아예 제도화한 게 선진국의 헤쳐모여 연정(聯政)이 아닐까도 싶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친윤과 경쟁자들은 한동훈 대표를 ‘배신자’라 규정했다. 뿌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의 인연일 터다. 국정농단 수사에서 박영수 특검이 뚝심 있다는 윤 검사를 부르고, 윤 검사가 일 좀 한다는 한 검사를 불렀다. 술도 안 마시며 인정사정·유도리없이(윤 대통령의 표현) 과녁을 옥죄었으니 윗분들 점수 딸 일밖엔 없었겠다. 정치적 검증도 안 된 그를 법무장관·당 비대위원장에까지 앉혀 주었다. 그런데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사과를 놓고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감히 바른 말을 했으니…. 채 상병 특검법(제3자 추천)마저 찬동이란다. “지금껏 생사 가르는 여정을 함께 겪어 온 동지”라며 풀어간 김건희 여사 문자에 회신조차 없다. “인간적 배신”의 프레이밍을 만든 논리다.
그러나 민심 끌어 선거 치르라며 보내놓곤, 국민 지지 높은 이슈들에 ‘용산의 방탄’ 노릇만 시켜 공멸이면 그게 정상적 정치일까. 정치를 떠나 51세 장년에 접어든 한 인간의 영혼과 자아마저 “하라면 하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게 특수부 검사 출신들의 이성 수준인가.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찍었다 철회한 320만여 명의 국민도 배신자일까. 그런 의문에의 답이 한 대표의 62.8% 득표율이다.
영부인과 권력 2인자의 관계 역시 흥미로운 정치의 관찰 대상이다. 유능했던 비서실장 도널드 리건은 보좌하던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란-콘트라 게이트로 물러난 리건은 낸시가 해임의 막후 조종자라 여긴다. 2년 뒤 그는 회고록에서 레이건을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움직이는 무능한 남자”로, 낸시는 “남편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여자”로 그렸다. 낸시가 점성술사에게 의존, 대통령 직무를 배후 조종한 실세였다고도 했다. 격분한 낸시가 곧이어 낸 회고록의 제목은 『내 차례(My turn)』였다. “리건이 걸핏하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행세했다”고 복수했다. 다만 점성술 얘기는 부인하지 못했다. 먼 나라 일, 쓸 데 없는 걱정이길 바란다.
지난주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힘 모아 잘 해보자 손을 잡았다. 큰 협력 속, 용산의 선택에 때론 당이 쓴소리도 해주는 건강한 권력을 기대해 본다. 나라와 민심 향한 소신이라면 그걸 배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참, ‘소신껏 배신’이 지금 가장 절실한 곳은 대표를 ‘아버지’로 부르는 또 다른 거대 정당이 아닐까 싶다.
최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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