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뒷것’ 김민기
그가 하늘로 돌아가는 길,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장례식장을 떠난 운구는 그가 평생의 꿈으로 가꾸었던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 자리(현재 아르코 꿈밭극장)에 잠시 머물렀다. 사람들이 ‘아침이슬’을 불렀다. 색소포니스트 이인권은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음악도, 삶도 참 아름다웠던 사람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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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세상의 중심을 탐할 때
무대 뒤 낮은 자리 고수한 큰 스승
자기 원칙 지킨 삶과 예술 감동
」
일주일 가까이 유튜브는 김민기 음악과 영상들을 추천해 준다. 댓글들이 하나같이 “우리 옆에 있어주어서, 좋은 음악을 들려주어서 행복하고 감사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그의 음악과 예술에 빚졌는지 잘 말해 준다. 내 또래가 비슷할 것 같은데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 초 여고생 때였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판매 금지된 김민기 1집(1971) 불법 복제 테이프를 쉬쉬하며 팔던 시절이었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 대학에 가서는 그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들었다. 노래운동 태동기였고, 역시 비합법 언더그라운드 음반이었다. 87년 서울시청 앞 이한열 노제에서도 ‘아침이슬’이 울려퍼졌다. 93년 CD 4장짜리 김민기 전집 앨범 발매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증표였다. 요즘은 잘 듣지 않지만 소중하게 모셔두었다.
90년대 이후엔 들국화, 김광석 등 학전에서 열린 공연을 많이도 보러 다녔다. 기자 초년병 시절 학전 옆 카페에서 김광석을 인터뷰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지난 3월, 경영난을 못 이긴 학전이 33년 역사를 뒤로하고 폐관하며 연 마지막 공연 ‘굿바이 학전’을 보고 나오며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었다. 이미 그의 암 투병 소식이 전해진 때였다. 나처럼 서성이는 사람이 많았다.
70~80년대 저항음악, 청년문화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앞장서 투쟁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 음악을 만들었고, 시대가 새겨진 그의 음악을 들으며 청년들의 피가 끓었을 뿐이다. 민예총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한때 농사짓던 시절을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하기도 했다. 워낙 앞에 나서 주목받는 것을 꺼리는 성정이라, 생전 인터뷰 영상에서도 시선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전을 통해 기라성 같은 스타 배우들을 키워냈지만, 평생 ‘앞것’들이 빛나도록 돕는 ‘뒷것’을 자처했다. ‘배울 학(學), 밭 전(田)’, 학전이라는 뜻 자체가 ‘못자리’다. 인재를 키워내는 못자리, 사람 농사꾼. 그가 돈 안 되는 어린이뮤지컬에 각별한 의욕을 보였던 것도 그래서다. 스스로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고 어쩌면 세상의 중심에서 더 많은 권력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극구 무대 뒤 낮은 자리를 고집했다.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에 따르면, 경영난에 처한 학전을 돕고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끝끝내 거부했다. “순수하게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만 번다”는 원칙에서다. “마음만 먹으면 돈을 벌 수 있는 역량이 있었지만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 원칙을 지켰다. 그게 사람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존경받았다.” 다큐멘터리 속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의 말이다.
“(스무 서너 살 때 보안사에 끌려가)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2015년 한 신문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들이다. 이 기사를 다시 꺼내 읽으며 다시 김민기를 듣는다. 문득 586 운동권들이 정권을 잡고 기득권이 돼 그들이 증오하던 이들과 똑같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이 떠올랐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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