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간염의 날, '간장선생'과 사도광산의 비극

김성호 2024. 7. 2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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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94] 영화 <간장선생>

[김성호 기자]

인간을 죽이는 수많은 질병이 있다. 그중 악독한 것 하나가 바로 간염이다. 바이러스 전염으로 간에 염증을 일으키는 이 간염 질환에 인간은 지난 수천 년 간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이 간염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했고, 그것이 다른 유행성 질환과 어떻게 다른지도 알기 어려웠다. A, B, C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건 고작 반백 년 전쯤의 일이다.

간염 바이러스 발견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전환이 됐던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무기력증과 피로감을 호소하다 배에 물이차고 장기부전과 출혈 등으로 죽어나가는 이가 수두룩했다. 피부와 눈 흰자위가 누렇게 뜬다 해서 황달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이는 증상일 뿐 병의 뿌리가 되지 못했다. 동서 의학은 황달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이를 수천 년 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인류는 1960년대에 A형 간염 바이러스를, 1970년대엔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다시 1980년대엔 C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하였다. 특히 1973년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일은 인류 보건의료에 획기적 전기가 됐다. 간염 사망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소위 '죽을 병'에 인간이 대항할 기회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B형 간염 백신이 개발돼 덧없이 죽었을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바루크 블룸버그 박사는 3년 뒤인 1976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0년 블룸버그 박사의 업적을 기려 그가 태어난 7월 28일, 즉 오늘을 '세계 간염의 날(World Hepatitis Day)'로 지정했다. 여전히 연간 130만 명, B형 간염으로만 80만 명 이상이 죽는 끔찍한 병이지만, 블룸버그가 없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좋지 못했을 테다.
 
 영화 '간장선생' 포스터
ⓒ 새롬엔터테인먼트
 
죄다 간이 문제라는 돌팔이 의사선생

일본 영화계가 낳은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간장선생>은 간염이 얼마나 끔찍한 질환인지를 내보인다. 1998년에 만들어진 영화는 2차대전 말엽, 일본 해안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간염환자를 돌보는 의사 아카기(에모토 아키라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얀 신사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채 왕진가방을 들고 내달리는 나이든 의사, 그게 바로 아카기다. 패망의 기운이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닥쳐온 전쟁의 끄트머리, 열도는 군비 충당을 위한 공출로 빈곤의 늪에 빠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죄다 비쩍 말라비틀어진 영양실조 상태, 툭 하면 픽 쓰러져 시름시름 앓는다. 아카기는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 사람들의 삶을 낫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골몰한다.

아카기의 노력에도 그는 마을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간장선생'은 사람들을 진료할 때마다 '간염'이란 진단을 내놓는 그를 조롱하는 말이다. 때는 1940년대 중엽이니 최초의 간염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20년 전이 아닌가. 처방이라고는 '잘 먹고 푹 쉬라'는 말 뿐이고, 열이 나도 황달이 있어도 복수가 차도 죄다 간염이라고만 하는 탓에 사람들은 그를 돌팔이로 취급한다.
 
 영화 '간장선생' 스틸컷
ⓒ 새롬엔터테인먼트
 
간염에 빗댄 군국주의 일본의 추잡함

그럼에도 아카기는 진지하다. 환자를 돌보고 정성 들여 의무기록을 작성해 간염에 대한 연구로 확장시킨다. 환자를 보지 않을 때는 종일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간염의 원인균을 찾으려 골몰한다. 그가 진료한 간염의심 환자만 무려 1500여 명, 내과 학술대회에선 박수갈채까지 받는다. 군 내과 군의관들이 그저 유행성 티푸스라고 진단하고 항생제를 주고 끝내던 것을 보다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한 간염이라 주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때는 전시, 군국주의 일본의 본토가 아니던가.

아카기를 지지하는 이는 죄다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저 존중받지 못할 뿐 아니라 배척당하는 이들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모르핀 중독자인 외과의사, 알코올 중독인 스님, 제 어미에 이어 창녀가 된 소녀, 술과 웃음을 팔며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라 말하는 술집 마담이 그들이다. 조롱받는 의사 아카기와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이 뭉쳐서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다. 티푸스가 아닌 간염이고, 간염이란 사실을 감추지 않아야만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그 근본적 대안이란 전쟁이 아닌 '잘 먹고 잘 쉬는' 일임을 알리려 든다.

사카구치 안고의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간장선생>이다. 영화는 그저 아카기라는 의사가 간염을 찾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은유로 작동한다. 간염은 온 국민을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로 내몰아 배곯고 지치게 만든 결과다. 국가는 한계가 닥쳐온 순간에도 문제가 유행성 질병인 티푸스일 뿐이라고, 이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오로지 아카기와 동료들만이 근본적 대응을 모색한다.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역사 지우는 일본

전체주의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군국주의는 민간의 효율적 대응을 막는다. 간염균의 원인을 발견해 불쌍한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겠다는 아카기의 노력은 거듭 좌절되기만 한다.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 채로 죽창을 들고 돌진하는 법을 익히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 우매한 군중이 아카기의 주변에 가득하다. 간염을 앓으면서도 약 하나 먹으면 고쳐지리라 믿는 멍청이들이다.

영화는 일본의 지난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다. 제 나라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나라 밖 가질 수도, 가져서도 안 될 것에 마수를 뻗쳤던 군국주의 일본의 과오를 일깨운다. 그 잘못을 간염이라는 고질적이며 무서운 질병에 빗댄다.

영화가 그린 시대로부터 80년이 흐른 오늘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때로부터 사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일본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제46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27일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확정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섬에 위치한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처해진 범죄의 현장이다. 제 의사에 반해 이곳으로 끌려온 조선인 2000여 명이 월 28일 이상 가혹한 환경에서 광산채굴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간장선생' 스틸컷
ⓒ 새롬엔터테인먼트
 
이 같은 역사를 지운 채 유네스코 등재를 시도한 일본의 움직임에 한국은 거세게 반발해왔다. 지난 2년 간 역사학계와 의식 있는 시민들의 저항작업이 물밑에서 있었다. 최근엔 러시아와 미주의 한국 교민사회까지 들고 일어서 릴레이 1인시위를 진행했다. 강제노역을 숨긴 채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의식 있는 동포들까지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저항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테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근대를 포함해 전체 역사를 전시에 반영하라 권고했다. 일본은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근대 역사를 지우려는 일본의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일각에선 일본이 향후 수백 곳의 문화유산을 가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준비하고 있다 전한다. 지난 2015년 7월 군함도를 포함한 23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을 당시에도 정보센터 설치는 물론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 약속한 일본이다. 약속은 뒤집혔고 강제징용 역사를 알리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리고 감추는 일은 의식을 멍들게 한다. 간염을 두고 티푸스에 듣는 약을 배급한 영화 속 군의관들처럼, 패망의 징후를 숨기고 백성들에게 죽창을 쥐게 했던 그 시절 일제처럼 말이다. "대일본은 영원하다"고 외치는 병사 앞에서, 피칠갑한 외국인 환자가 읊조리던 "너는 온몸이 간염에 오염 됐구나"는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든다.

오늘날 일본은 전과 달라졌는가. 이마무라 쇼헤이와 사카구치 안고가 강제징용 역사를 지우려는 제 조국의 시도를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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